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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인 이상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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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1박2일 주옥같은 가톨릭 성지와 신라 천년의 경주 문화유적지 탐방 ![]() 상품기본정보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 진행으로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기도를 방해하지 않습니다.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맛있는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20명 이상 출발 기준 전용차량으로 진행되며 성지순례 전문 해설가이드가 편안하게 모십니다. ►20명 이상인 경우 단독 미사 및 신부님 동행이 가능합니다. ►소수인원 단독 운영 신청시 별도 견적을 드리며 미사는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불포함사항►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 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여정 변경 요청시 이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됩니다.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는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상품도 운영하고 있사오니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인원이 성원 되지 않을 경우 1주일 전 취소가 진행되며 100% 환불해 드립니다. 쇼핑센터※ 노쇼핑 노옵션 ※ 문의 비안네 성지순례 (주)점프투어리즘 여행사 ◆ 현 일정은 기후 변화나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동될 수 있습니다. 일정표관덕정 순교자들의 순교터에 세워진 도심 속 순교 기념관 대구 관덕정(觀德亭)은 조선 시대 무과의 하나인 도시(都試)를 행하던 도시청(都試廳)으로 영조 25년에 세워졌습니다. 관덕정 앞마당에 자리한 연병장에서는 무과를 위한 활쏘기와 말타기, 세시 민속놀이인 줄다리기도 행해졌습니다. 관덕정이 천주교와 연관을 맺은 것은 연병장 가장자리인 아미산 처형장에서 천주교인들이 순교하면서부터입니다. 당시 중죄인으로 취급됐던 천주교인들은 박해 때마다 이곳에서 온갖 참혹한 방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선조 34년에 경상도 감영이 대구에 설치되면서 경상도 전역의 교우들이 대구로 이송되어 감영에서 옥사하거나 처형장에서 순교했습니다. 이렇게 관덕정과 감영 등 대구 지역에서 순교한 20위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관덕정이 순교성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순교자 이윤일 요한이 시성되면서부터입니다. 대구대교구는 사형터로 고증된 부지를 확보하여 1985년 순교기념관 기공식을 시작으로 1991년 1월 20일 지하경당 축복식과 이윤일 성인 유해 이전 봉안식을 갖고 그해 5월 31일 개관하였습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한식 누각으로 당시 관덕정 모습을 재현한 순교 기념관에는 이윤일 성인의 유해와 함께 많은 성인과 순교자들의 유해 그리고 영남 지역 교회사를 살펴볼 수 있는 귀한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연간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덕정 순교 기념관은 순교정신을 함양하고 신자들의 신앙 재교육과 선교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1992년부터 매년 ‘성 이윤일 요한제’를 기획 · 거행하고 있습니다. 2002년 1월 21일에는 기념관 입구에 대구대교구 제2주보성인인 이윤일 요한 성인의 동상을 세웠고, 2007년 1월 21일 기념관 바로 옆에 신관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회의실과 강당 등을 갖춘 신관은 순교신앙 학습의 장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016년에는 개관 25주년을 맞아 2014년 시복된 124위 중 이곳에서 순교한 11위 ‘순교 복자 기념비’ 제막식을 거행했습니다. 성유스티노신학교 1914년 개교한 대구의 첫 신학교 1911년 대구 대목구가 설정되면서 초대 대목구장으로 임명된 드망즈 주교는 주교관 · 신학교 · 주교좌성당의 증축이 이루어지면 루르드 동굴과 유사한 동굴을 세워 성모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때부터 신학교 설립은 교구의 가장 중요한 사업 가운데 하나가 되었습니다. 서상돈이 기증한 부지에 신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드망즈 주교는 세계 각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고, 그 결과 1912년 성 유스티노를 주보로 모신다는 조건으로 익명의 기부자로부터 25,000프랑을 기증받아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성모당 대구대교구청 내에 위치한 성모당은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순례자들의 기도를 들어주는 열린 성지, 치유의 성지입니다. 1911년 조선대목구에서 대구대목구가 분리 · 설치되면서 부임한 드망즈 주교는 교구에 꼭 필요한 주교관, 신학교, 주교좌성당 증축을 이뤄주면 교구의 가장 아름다운 장소를 성모님께 봉헌하여 그곳에 루르드의 성모동굴 모형대로 성모당을 세워 모든 신자들이 순례하도록 하겠다고 허원을 드렸습니다. 1913년과 1914년에 주교관과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건립했고, 주교좌성당 증축이 늦어지던 중 당시 계산 주교좌성당 보좌 소세 신부가 중병을 앓아 선종 직전에 이르자 드망즈 주교는 소세 신부를 낫게 해주면 주교좌성당 증축 전에 성모동굴을 봉헌하겠다고 새로 약속했습니다. 소세 신부가 기적적으로 살아나자 1917년 7월 31일부터 성모동굴 공사를 시작하여 1918년 8월 15일 공사를 마쳤고, 10월 13일 마침내 축성식을 가졌습니다. 동굴 윗면에 있는 ‘1911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 1918’의 1911은 대구대교구가 설립된 연도이며, 1918은 드망즈 주교가 교구를 위해 청한 3가지 소원이 다 이루어진 해를 가리킵니다. ‘EX VOTO IMMACULATAE CONCEPTIONI’는 ‘원죄 없이 잉태되신 성모님께 바친 서원에서’라는 뜻입니다. 성모당은 신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거룩한 땅일 뿐 아니라 각종 가톨릭 신심행사와 종교의식이 거행되는 사적지로 외교인들도 큰 호기심을 갖고 있는 대구의 명소입니다. 1990년 12월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었고, 1997년 보수공사를 하여 새로 단장했습니다. 2009년에는 로마의 성모 대성전과 영적인 유대를 맺은 성모 성지로 지정되었습니다. 2018년 10월에는 성모당 봉헌 100주년을 기념해 각종 행사와 기념미사를 거행했습니다. 샬트르성바오로수녀원 1888년 7월22일 하얀 꼬르넷을 쓴 네 명의 첫 선교수녀들이 아직 순교의 선혈이 채 마르지 않은 조선 땅에 첫 발을 내딛었다. 이는 조선에 신앙의 자유와 함께 주신 하느님의 첫 선물이 되었다. 입국 일주일 후에 순교자들의 후손 5명의 처녀들이 입회하면서 순교의 영성이 봉헌의 삶으로 꽃피워지기 시작하였다. 자카리아수녀와 첫 선교 수녀들- 자카리아 수녀는 조선에 온 첫 프랑스 선교수녀로 한국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의 제 1대 원장이다. 1888년 5월 31일 샬트르를 출발하여 두 달간의 긴 여행 끝에 에스텔수녀와 두 명의 중국 수녀들과 함께 조선에 도착하였다. 수녀들은 가난과 질병 속에서도 꿋꿋이 하느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며 자신을 봉헌하였다. 자카리아수녀는 6개월 후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고, 초창기 수녀들은 대부분 과로와 질병으로 일찍 사망하였다. 첫 선교 수녀들의 희생은 많은 여인들이 수도자의 길을 걷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1911년 6월 11일 로마 교황청에서는 조선 대목구(단일교구) 제8대 교구장 뮈텔주교의 관할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분리하여 대구교구를 신설하고 제 1대 교구장으로 드망즈 주교를 임명하였다. 이에 조선의 단일교구가 <서울교구>, <대구교구>로 분리되었다. 대구교구 출범 후 드망즈 주교와 로마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인 베이드 베이야 주교 사이에 대구교구 내에 수녀원 설립과 후원에 관한 구체적인 협약이 체결되어 드망즈 주교는 1914년 6월16일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총장수녀에게 수녀원 설립 허락을 공적으로 요청하면서 그 필요성과 연유, 건축자금, 기타 계획에 관한 협약서의 사본을 동봉하였다. 1915년 10월 12일 대구수녀원 역사 사진선교사 뱅상 수녀와 3명의 수녀가 파견되었다. 수녀들이 도착한지 3일 후인 10월 15일 에는 대구 수녀원과 임시성당을 축성하여 첫 미사를 성체강복으로 봉헌하고 입주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교우가정에서 양육되고 있던 30명의 고아들을 수녀들에게 위탁하였다. 드망즈 주교는 처음부터 대구수녀원 설립에 관한 모든 계획과 수련원 설립, 수녀원 묘지에 관한것 등... 성녀 소화 데레사께 의탁하였다. 모든것이 성녀의 전구로 이루어진 것이라 여기며 항상 감사하여 옛 성당 주보성녀로 모셨다. 계산 주교좌성당 계산 성당은 1886년 블랑 주교에 의해 대구 경북 지역 최초의 본당(당시 대구 본당)으로 설립되었고, 1911년 대구대목구의 신설과 함께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되었습니다.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는 박해의 여파로 신나무골에 머물다가 대구 박해 이후 죽밭골로 옮겼고, 1891년 대구 교안으로 불리는 ‘로베르 신부 축출 사건’으로 대구에서 추방되었습니다. 그 해 다시 대구로 돌아온 로베르 신부는 대어벌에 임시 성당을 구했고, 이어 1897년 현재의 위치인 대구 계산동에 부지를 마련하여 성당 신축을 시작했습니다. 1899년 전통 한식의 목조 성당을 완공해 루르드의 성모 마리아를 주보로 축성식을 거행했으나 1901년 화재로 소실되었습니다. 재차 성당 건립을 시작해 1902년 2개의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의 고딕식 벽돌조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두 번의 성당 내부 공사에 이어 1918년 기존 종탑을 2배로 높이고 성당의 동남북 3면을 증축해 1919년 5월 재차 축성식을 갔고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산 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성당이며 대구에 현존하는 1900년대 유일한 서양식 성당 건축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1년 사적 제290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이어 1991년 성당 건립 후 처음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통해 새롭게 태어났고,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은 1986년 성당 마당 한 편에 자그마한 공원을 조성하고 계산 성당을 지은 초대 주임 로베르 신부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2006년 본당 설립 120주년을 맞아 문화관 2층에 유물 전시관을 마련하였고, 2009년에는 대구시에서 추진 중인 근대문화거리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성당 외벽 조명을 설치하고 성당 마당을 공원으로 조성해 열린 공간으로 변화를 꾀하였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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