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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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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광주교구 → 3박 4일 전주 광주 교구내 거룩한 성지 전체를 순례 하는 3박4일 일정 인접한 전주 광주 모든 성지를 순례하며 기도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포함된 모든 식사(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석식,3일차 조,중,석 4일차 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여정 변경 요청시 이에 따르는 추가 비용이 발생됩니다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인원이 성원 되지 않을 경우 1주일 전 취소가 진행되며 100% 환불해 드립니다. 쇼핑센터※ 노쇼핑, 노옵션, 노쇼핑 ※ 문의 비안네 성지순례 (주)점프투어리즘 여행사 ◆ 현 일정은 기후 변화나 현지 사정으로 일부 변동될 수 있습니다.
☞ 주말에는 업무 상담이 불가하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까지 업무 상담이 가능합니다. 이후 시간이나 공휴일 주말의 경우 변경 취소 등 상담 업무가 불가하므로 양지 바랍니다. [여행 취소 시 환불규정 안내]
소그룹 패키지 기준
1. 출발 30일전 100% 환불 / 출발 29- 25일 전 90% 환불 / 출발 24-20일전 80% 환불 / 출발 19일-15일전 70% 환불 / 14일- 10일전 60% 환불/ 9일 – 5일전 50%환불/4일-3일전 40%환불/ 2일-1일전 30%환불/ 당일 취소 20% 환불
소그룹 단독 기준(인원을 충원할 경우 항공사 수수료 외 별도의 수수료를 부과하지 않습니다.) 인원 충원이 불가 할 경우 단독으로 다른 팀이 합류 하기 어려우므로 아래와 같이 수수료가 발생됩니다.
1. 출발 30일전 90% 환불 / 출발 29- 25일 전 80% 환불 / 출발 24-20일전 70% 환불 / 출발 19일-15일전 60% 환불 / 14일- 10일전 50% 환불/ 9일 – 5일전 40%환불/4일-3일전 30%환불/ 2일-1일전 20%환불/ 당일 취소 0% 환불
2. 여행일 변경, 상품변경도 취소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3.. 정규 업무시간에만 취소/변경 처리됩니다.
4. 출발 전날, 18시 이후부터 출발시 까지 취소 요청을 하거나 여행 불참 시 당일 취소로 간주되며 20% 환불 됩니다.
※ 기상악화등의 천재지변에등으로 출발 불가 한 경우 호텔 및 차량 등 환불 조건에 따라 환불 가능한 금액이 상이합니다. 고객 변심으로 출발 불가 확정 전 취소시에는 고객변심에 의한 취소료 수수료 규정에 따라 수수료를 부과합니다.
◈ 상기 일정은 기상악화 및 현지상황에 따라 다소 달라질 수 있습니다.
◈ 호텔 객실상황은 실시간으로 변동 될 수 있으니, 예약전 가능여부 문의 부탁드립니다.
◈ 8명 이상시, 단독진행 요청이 가능합니다, (031-706-9175 문의 주세요)
◈ 최소 출발인원 8분이며 인원이 충족되지 않을 경우 순례가 취소 될 수 있습니다. 출발 유무 관련 일주일 전 최종 안내를 드립니다.
일정표
김제순교성지 요촌성당 김제시 요촌 지역 일대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때는 확실치 않으나, 1920년 구장리 공소의 회장 김정엽이 검산리 공소를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요촌본당의 전신인 검산리 공소는 이후 신자 수가 늘어나자 수류성당의 뤼카 신부가 마련한 부지에 새로 성당을 건립하게 되었다. 1935년 6월 16일 수류성당에서 분리되어 김제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신부로 이상화 베르톨로메오 신부가 부임하였다. 본당 설립 후 일제의 탄압과 6·25전쟁을 겪으며 본당 운영이 마비되기도 하였으나, 1954년 현재의 성당 부지인 요촌동에 땅을 매입하고 1956년 검산동에서 요촌동으로 이전하여 성당을 신축하였다. 같은 해 6월 17일 성모유치원이 개원하였다. 1985년 1월 26일 신풍성당이 김제본당에서 분리 신설되면서 김제본당은 요촌성당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서천교 성 조윤호의 순교터 서천교는 병인박해때 순교한 조윤호 성인의 순교터이다. 조윤호는 조화서 성인의 아들이며, 1839년에 치명한 조 안드레아의 손자로, 부친 조화서와 함께 완주 소양 성지동에 살다가 함께 잡혀와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 뒤에 서천교에서 밧줄로 목이 졸려 순교했다. 그는 전주 감영에서 부친과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부친이 형장으로 갈 때에는 서로 천국에서 만날 것을 기약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자를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칼로 처형할 수 없다는 국법에 따라 부친이 참수된지 10일 뒤인 12월 23일(혹은 12월 18일, 12월 28일) 전주 서문 밖 서천교 형장에서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죽지 않아 끝내는 밧줄로 목을 졸라 사형시켰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초록바위 초록바위는 병인박해 때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성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순교자 홍봉주의 아들이 수장된 순교터로 곤지산 끝자락 전주천으로 이어지는 절벽 부분인데, 현재는 도로를 확장하면서 축대를 쌓아놓아 옛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남종삼과 홍봉주는 온 가족을 처형하거나 노비로 삼고 가산을 몰수하는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아들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1867년 가을 전주천에 밀어 넣어 죽였습니다. 전주교구에서는 두 소년 순교자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습니다. 전동성당 전동 성당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유교식 조상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태워 참수형을 받은 한국교회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가 순교한 자리에 세워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전동 성당 터는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불립니다. 또한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김유산 토마스,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이우집, 윤지충의 아우 윤지헌이 순교한 곳이기도 합니다. 전동 성당 초대 주임인 파리 외방전교회 보두네 신부는 20세기 초 전동 성당을 지을 때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이를 가져다가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습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 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습니다. 호남 최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서양식 건물로 1981년 사적 제288호로 지정된 전동 성당은 2006년부터 대대적인 보수사업을 시행했고 이어서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여 2011년 12월 사제관 뒤편에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전북 문화재자료 제178호로 지정된 사제관을 보수해 유물전시관으로 활용하고, 주변 부대시설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는 사적공원화 사업이 완료되면 전동 성당은 인근의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되는 성지순례와 역사문화 체험의 중심축을 이루게 됩니다. 치명자산 치명자산은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아들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 등 일가 7명의 신유박해 순교자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원래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리던 이곳에 1914년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또는 루갈다산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 유문석, 유중성, 유중철, 이순이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유항검 일가의 흔적을 없앨 요량으로 처형과 함께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내렸습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히 시신을 수습해 고향인 초남 땅에 묻지 못하고 김제군 재남리에 가매장했습니다. 1914년 전동 성당의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그들의 유해를 치명자산 정상으로 옮겨 모셨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아래 유항검 일가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성당을 지어 1994년 봉헌했습니다. 치명자산은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 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뜨(순교자산)입니다. 전주숲정이성지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머리’로도 불린 전주 숲정이는 조선 시대 군사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곳으로 박해가 시작되면서 천주교 신자들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 1802년 1월 31일 호남의 사도 유항검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자부 이순이, 조카 유중성 등 유항검의 가족이 처음 참수되면서부터 순교자의 피가 마르지 않아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 때 많은 신앙인들이 순교하였다. 그중 신유박해 순교자 이순이와 유중성, 기해박해 순교자 김대권, 이태권, 이일언, 정태봉, 신태보가 2014년에 복자품에 올랐고, 병인박해 순교자 정문호, 손선지, 한재권, 조화서, 이명서, 정원지는 1984년 모두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유함검의 가족 순교자 중에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동정부부가 있습니다. 이 루갈다는 성모 마리아를 닮아 평생 동정을 결심했고, 이를 안 주문모 신부가 호남 전교 길에 유항검의 장남 중철 또한 동정으로 살려는 원의를 확인하고 혼사를 주선하여 성 요셉과 성모 마리아와 같은 동정부부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4년 동안 굳은 의지로 정결한 생활을 해 온 동정부부는 신유박해를 만나 순교의 영광을 입게 되었습니다. 숲정이 성지는 1930년대 초 이명서 성인의 손자가 순교터를 매입하면서부터 교회 사적지로 조성되어 1935년 십자가 순교비가 서고 1968년 순교복자 현양탑이 건립되었습니다. 1984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으나 도시화의 물결로 1992년 해성 중고등학교가 이전하고 아파트가 건립되면서 본래의 순교터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본래의 장소에서 150m 정도 떨어진 곳에 새로 성지를 조성하여 순교터에서 옮겨 온 토사를 그 위에 덮고 십자가와 순교자 현양탑을 세웠습니다. 2004년 6월에는 성모자상과 14처를 마련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초남이성지(유항검의 생가터) 초남이 성지는 ‘호남의 사도’로 불리는 순교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유명한 유항검의 맏아들 유중철 요한과 며느리 이순이 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 요한, 유항검의 동생 유관검과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 마태오 등 유항검 일가가 살았던 생가터입니다. 1801년 신유박해로 유항검 일가가 모두 순교하자 유항검의 생가는 ‘파가저택’(破家瀦宅)형을 받아 저수지로 변하면서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들 순교자 중에서 유항검과 그의 아들 유중철과 유문석, 며느리 이순이, 조카 유중성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초남이 성지가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주교구는 이우집의 문초 기록과 지역 토착민들의 증언 등을 토대로 파가저택지와 유항검 교리당터, 가매장터를 확인하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1987년 성지 축복에 이어 2000년 생가터를 새단장하고, 2002년 한옥 형태의 교리당과 ‘정지샴’(샘물)을 복원했으며, 2005년 주문모 신부 미사 봉헌 기념경당을 일자형 한옥 형태로 건립했습니다. 2006년에는 파가저택지 옆에 동정부부가 4년간 살았던 행랑채를 복원하여 현재 성체조배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시복식을 준비하면서 생가터에 경당을 마련하고, 교리당터 입구 조경공사 등을 통해 한층 아름다운 성지로 변모했습니다. 곡성옥터, 성당 곡성은 1827년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교우들이 붙잡혀 와 갇힌 옥터가 있는 곳입니다. 당시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 천주교 신자였는데, 1827년 덕실 마을의 한 옹기점에서 가마를 여는 축하연 중 순교복자 한덕운 토마스의 아들인 한백겸이 술에 취해 행패를 부렸고, 주막집 주인이 현감에게 몇몇 신자들을 고발하면서 정해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여느 박해와 달리 그 기간은 짧았지만 탄압의 정도는 매우 심해 대부분이 배교했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이 막달레나, 이성지, 이성삼, 이경언 등은 끝까지 신앙을 지켜 옥사하거나 순교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광주교구는 1957년 순교의 현장에 본당을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박해 당시 옥터였던 객사 자리를 매입하여 1958년 8월에 본당 설립에 이어 그해 10월에 성당을 준공했습니다. 2001년 곡성 성당은 성지조성 계획을 발표하면서 성역화를 본격화해 2002년 7월 정해박해 순교성지 기념 '하늘못' 축복식을 가졌고, 정해박해의 진원지이자 옥터 위에 세워진 본당에 걸맞게 2006년 성당에 대한 개축공사를 실시했습니다. 또 정해박해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옥터 전시실을 개관하고, 2008년 10월 본당 설립 50주년 기념사업으로 성당 마당에 옥사(獄舍)를 복원하고 야외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는 등 옥터 공원화사업을 시행했습니다. 2011년 10월 종합관(아가페)을 신축하여 축복식을 갖고, 2016년 3월에는 성당 지붕의 낡은 슬레이트를 공판으로 교체하는 등 정해박해 기념성지 조성에 힘쓰고 있습니다. 고창개갑장터순교성지 복자 최여겸의 순교지 무장현 공음치면(현 공음면 석교리)의 개갑 장터는 유명한 우시장이었다. 이곳에서 순교한 최여겸은 전라도 무장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고 윤지충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이후 충청도 한산으로 장가든 후 이존창을 통해 독실한 신자가 되었고 고향으로 돌아와 무장, 흥덕,고창, 영광, 함평 등 서남 해안 지역을 대상으로 많은 이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가 복음을 전해 세례를 받은 사람은 기록에 남아 있는 것만도 28명이나 되었다. 신유박해(1801)가 일어나자 처가인 한산으로 피신하였지만 거기에서 체포되어 무장과 전주 감영으로 차례로 이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러다가 옥중에서 열심한 신자 한정흠과 김천애를 만나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였다.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포도청과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했다. 이에 따라 최여겸은 고향인 무장으로 이송되어 며칠 후 개갑 장터에서 8월 27일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나이는 39세였다. 이곳은 고창군 지정 향토문화유산 제1호로 지정되었다. 영광순교자기념성당 영광 지역에 복음이 처음 전해진 것은 1791년 신해박해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먼저 호남의 사도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형제의 모범과 애긍을 통해 그들이 소유한 전답의 소작인과 마름들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에게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윤지충 바오로를 통해 전라도 각지에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와 인척 관계를 맺은 영광의 이우집 또한 유관검의 권유로 입교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로 고산 저구리로 들어와 교우촌을 형성한 윤지헌 프란치스코를 통해서도 복음이 전해졌는데, 그를 찾아와 교리를 배우고 입교한 이들 중에 영광의 윤종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무장에 살던 최여겸 마티아의 열정적인 선교를 통해서도 전해졌는데, 그가 입교시킨 많은 사람 중에 영광에 살던 조카 최일안과 영광 고을의 양반인 이화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광 지역은 호남에서 천주교가 비교적 일찍 그리고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영광 지역 신자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이화백과 복산리의 양반 오씨가 영광에서 순교했고, 이우집과 최일안은 전주에서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이종집과 남조이는 황해도의 문화와 운율로 각각 귀양 갔고, 강완숙 골룸바의 딸 홍순희 루치아가 영광으로 귀양 왔습니다. 병인박해 중인 1867년 영광 뜸밭 출신으로 공주 국실에 살던 김치명이 공주에서 교수형으로, 1872년 한때 영광 신어실에 살았던 유문보 바오로가 나주에서 옥사로 순교했습니다. 여러 기록으로 보아 당시 영광 지역의 교세는 전라도에서 세 번째로 컸다고 보입니다. 1937년 영광에 본당이 처음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의 와중에 한때 영광 본당은 폐쇄되어 산정동 본당과 함평 본당의 공소가 되었습니다. 60년대 들어 신자가 늘자 1965년, 전쟁 당시 전소된 성당 자리에 새 성당을 재건하고 12월에 공소에서 본당으로 재승격되었습니다. 영광 순교자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광주대교구는 2010년 9월 영광 성당을 ‘영광순교자기념성당’으로 지정했습니다. 2014년 6월 영광순교자기념성당을 봉헌하고, 본당 설립 80주년을 기념해 성당 1층에 ‘영광순교자기념관’을 마련했습니다. 이 기념관은 특별히 영광의 여섯 순교자와 세 유배자 그리고 초기교회 신자 둘을 기리고 있습니다. 나주성지 나주 성당은 1933년 공소가 설립된 후 1935년 본당으로 승격되면서 성당을 신축했습니다. 이 성당은 골롬반 외방전교회가 한국에서 건립한 첫 번째 성당입니다. 나주 성당 구내에는 1839년 기해박해 때 나주에서 순교한 이춘화 베드로와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한 강영원 바오로, 유치성 안드레아, 유문보 바오로 네 순교자의 위대한 신앙을 기리는 경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광주대교구의 유일한 순교지인 무학당 인근에 위치한 관계로 나주 본당은 설립 70주년을 맞아 성역화를 본격화해 2001년 나주 초등학교 내에 위치한 무학당 순교 터에서 주춧돌로 추정되는 12개의 돌 중 10개의 돌을 성당으로 옮겨와 그 위에 무학당을 상징하는 구조물을 세웠습니다. 이어 2004년 본당 내에 ‘빈무덤’ 형태의 순교자 기념경당을 건립하고, 1934년 7월 나주에서 최초로 지어진 서양식 벽돌 건물인 사제관을 수리해 현 대주교 기념관을 개관했으며, 까리따스 수녀회 한국 첫 본원으로 쓰였던 한옥 기와집도 복원했습니다. 2011년 5월에는 나주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무학당 터의 흙을 취토하여 순교자 묘원을 조성했습니다. 목포 산정동성당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으로 1897년 5월 8일 수류 본당으로부터 분리 · 설립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이 노령산맥을 따라 새로운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며 전남 지역에 복음이 전파되었고, 1872년 나주 무학당에서 순교의 역사를 쓰면서도 꾸준히 성장했습니다. 1896년까지 전남 지역은 본당 하나 없이 수류 본당에 속한 공소들만 있었지만, 1897년 뮈텔 주교가 전라도 지역을 순방하면서 나바위 본당과 목포 본당의 신설을 결정했습니다. 목포 본당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데예 신부는 1899년 아담한 연와제 성당을 완공했고, 1911년에 대구교구가 설정된 후 부임한 샤르즈뵈프 신부는 산정동 97번지(구 성 골롬반 병원 구역)에 새 성당을 건축해 1913년 12월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교황청 포교성성은 1933년에 전남과 제주 지역의 사목을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위임했습니다. 1945년 5월 일본군 사령부로 징발된 성당을 광복과 함께 되찾았지만 6.25 전쟁으로 다시 인민군 막사로 징발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고, 본당 주임 쿠삭 신부와 보좌 오브라이언 신부가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1950년 8월경 대전에서 피살되었습니다. 목포 수복 후 부임한 모란 신부는 1953년 한국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했고, 1966년 브라질 신부가 새 본당 부지에 현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해 봉헌식을 가졌으며, 1978년 이재흥 신부는 6.25 전쟁 때 순교한 브렌난 몬시뇰과 본당 신부들의 순교비를 성모상 옆에 건립했습니다. 1988년 김성용 신부는 레지오 마리애 한국 도입 기념비를 세웠고, 김양회 신부는 본당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을 건립해 1998년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렇듯 산정동 성당은 광주대교구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 레지오 마리애가 처음 도입된 곳이며, 6.25 때 순교한 세 성직자의 순교기념비가 있는 유서 깊은 곳입니다. 광주대교구는 산정동 성당의 역사적 의미를 살리고 바로 옆 성 골롬반 병원으로도 사용되었던 옛 교구청 건물의 등록문화재 지정 등을 계기로 목포시와 손잡고 이 일대를 ‘가톨릭목포성지’로 조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2016년 봄 1단계 사업으로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건립을 시작하고, 구 교구청 건물에 대한 복원 및 보수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마무리하고 가톨릭 목포성지 역사박물관으로 재단장해 2017년 8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이어 9월에는 한국 레지오 마리애 기념관 축복미사를 봉헌하며 1단계 사업을 마무리하고, 2단계 사업으로 성 미카엘 대성당 공사를 시작해 2019년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여산 하늘의 문 성당 여산성지는 1868년 무진박해 당시 금산, 진산, 고산 등지에서 붙잡혀 여산 관아로 이송된 신자들이 순교한 곳이다. 공식적으로 기록된 순교자만 25명으로, 당시 순교자들은 여산 곳곳에서 참수형, 교수형은 물론 백지사형(白紙死刑)으로도 목숨을 잃었다. 여산성지는 2007년 10월 19일 전라북도 기념물 제125호로 지정된 후 이듬해부터 본격적인 성지개발을 추진, 순차적으로 성지 조성 사업을 진행해왔다. 여산본당은 1959년 1월 17일 설립됐다. 성지는 2016년 순교기념관을 봉헌한데 이어 2017년 이후 교구 전대사 성지로 지정됐으며, 이후 주차장과 십자가의 길, 천국의 계단, 돌무덤 조성 등 순례자들을 위한 시설 확충에 힘써왔다. 또 2015년 5월부터는 ‘첫 토요일 월피정’을 시작하는 등 성지개발을 위한 영적 준비에도 힘써왔다. 천호성지 천호(天呼) 성지는 1839년 기해박해를 전후해 형성된 유서 깊은 교우촌으로 병인박해의 모진 회오리가 불어 닥치던 1866년 12월 13일(음)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여섯 성인 중 이명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한재권 요셉과 같은 해 8월 28일(음) 공주에서 순교한 김영오 아우구스티노,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열 명의 무명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곳입니다. 그 밖에도 1868년 여산에서 순교한 많은 순교자들이 이곳 천호산에 종적을 감춘 채 묻혀 있습니다. 전주교구는 시성식이 끝난 1984년 10월부터 천호 성지 개발에 본격 착수하여 1985년 11월 30일 새롭게 단장한 순교자 묘역을 축성하였습니다. 성모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설치하고 1987년 피정의 집을 완공했습니다. 2007년 5월 천호 부활성당을 새로 건립했고, 2008년 5월에는 낡고 오래된 천호 공소 경당(현 천호 성당)을 새로 건립했습니다. 또한 다양한 도보 순례길을 개발하면서 2009년에 전북 지역 4대 종교 성지를 걷는 ‘아름다운 순례길’도 함께 마련했습니다. 2013년 12월에는 한국교회 최초로 ‘천호 가톨릭 성물박물관’을 개관하여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나바위성지 나바위는 한국의 첫 방인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국에 입국하며 첫발을 내디딘 축복의 땅입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그 해 8월 31일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0월 12일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습니다. 화산 성당으로도 불리던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7년에 완성했습니다. 설계는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기존 종탑은 헐고 입구에 고딕식 벽돌조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습니다. 1922년 회랑 기둥 밑 부분을 석조로 개조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1987년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뒷산에는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피정을 하던 망금정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 화강석으로 만들어 세운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성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제대와 각종 성물들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화산 성당으로도 불리던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7년에 완성했습니다. 설계는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기존 종탑은 헐고 입구에 고딕식 벽돌조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습니다. 1922년 회랑 기둥 밑 부분을 석조로 개조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1987년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뒷산에는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피정을 하던 망금정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 화강석으로 만들어 세운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성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제대와 각종 성물들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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