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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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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국내 첫사제 김대건 안드레아 탄생 200주년 기념 생애를 묵상하며 3박4일 순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탄생부터 순교까지 전체 코스를 순례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해상 입국로 발굴을 위한 마지막 탐색과정중 지나가셨던 백령도 일정 포함
포인트
►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백령도 여객선 탑승을 위해 개인 신분증을 꼭 지참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석식) 4일차(조,중식)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불포함사항►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기후 변화로 백령도 입도 불가시 대체 일정으로 진행되며, 입도 후 기후 악영향으로 안정상 여정 변경이 필요한 경우 숙박 및 식사 이동 등에 추가로 발생되는 비용은 순례자 부담입니다. 또한 개인 사정으로 여정 변경 요청시 이에 따르는 추가 비용은 개인 부담입니다. 특이사항►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인원이 성원 되지 않을 경우 1주일 전 취소가 진행되며 100% 환불해 드립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백령도성당 백령성당은 우리나라 최서단, 최북단에 위치해 있는 인천교구 소속 가톨릭성당이다. 1959년 인천 답동성당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신부는 모페트 에두와르도이다. 백령도는 일찍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선교사들의 입국로를 개척하면서 중국 어선과 접촉하여 편지와 지도를 전달했던 곳으로 천주교와 아주 오랫동안 인연이 있던 곳이나 도서지방이라는 특수성과 강한 무속신앙의 잔재로 천주교 신앙이 오랫동안 전파되지 못하다가 1947년 장연 본당의 신자 여러명이 백령도에 정착하게 되면서 백령 공소로 시작되었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에 몇몇 선교사들이 중국의 변문과 의주의 관문을 통하여 조선에 입국하였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1839년에 잡혀 문초 받는 과정에서 선교사들이 의주를 통하는 육로로 입국한 사실이 드러났고 그 후 정부의 경계강화로 인하여 육로입국은 위험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미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페레올 주교는 1846년에 김대건 신부에게 해로를 통한 밀입국로를 개척하라고 지시했다. 김대건 신부는 백령도를 거점으로 하는 밀입국로를 페레올 주교에게 건의했다. 백령도는 중국 산동반도와 매우 가깝고 매년 봄에는 그 근해 어장에 중국 어선들이 모여드는 것에 착안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중국 어선으로 백령도 근해에 도착하고 이곳에서 조선 교우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하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는 서울 마포를 출발, 백령도에 도착하여 앞으로는 선교사들이 백령도를 통한 밀입국로를 이용하라는 페레올 주교의 서한을 중국선원에게 전달한 후 순위도에서 관헌에게 체포되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의 착안과 개척의 덕으로 백령도는 1846년부터 1880년까지 프랑스 선교사 17명의 해로입국 기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중 6명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1984년 서울 여의도에서 요한 바오로2세교황님이 집전한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 미사 중에 성인품에 올랐다. 왜고개성지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입니다. 또한 왜고개 성지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왜고개 성지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사적 중요성과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군종교구에서는 2013년 12월 순교자 현양비,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 기도처 등을 건립하여 성지를 확장하여 새 단장한 후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새남터 순교성지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프랑스인 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한옥 양식으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습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솔뫼성지 솔뫼는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탄생지로서, 성인이 박해를 피해 용인 땅 골배마실로 이사 갈 때인 일곱 살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소나무가 우거진 작은 동산’이라는 뜻을 가진 ‘솔뫼’는 김해 김씨 안경공파인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1814년 순교), 종조부 김종한(1816년 순교), 부친 김제준(1839년 순교) 그리고 김대건(1846년 순교) 신부 등 4대의 순교자가 살던 곳입니다. 이 작은 마을에 복음이 전래된 것은 ‘내포의 사도’로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그의 고향인 충청도 지방의 전교를 맡으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가 면천 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그는 이존창으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곧 벼슬을 버리고 신앙생활에 전념하였고, 그로부터 이곳 솔뫼는 교우촌이 되었습니다. 1906년 합덕 성당 주임 크렘프 신부는 솔뫼를 성역화하기 위해 인근의 토지 매입을 시작하였고, 194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00주년을 앞두고 백 필립보 신부는 복자 김대건 신부 100주년 순교 기념비를 세우고 생가 터를 매입하였습니다. 그 후 대전교구는 1976년부터 성지 개발을 본격화해 이듬해 3미터 높이의 김대건 신부 동상과 기념탑을 건립했습니다. 이어 1983년에 순교자 신앙을 가르치고 전하는 솔뫼 피정의 집을 건립하여 솔뫼 성지를 ‘순교자 신앙의 학교’로 삼았습니다. 또한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의 생가 터에 지자체와 함께 2004년 9월 생가를 복원하였고, 2006년 3월에는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축복식을 갖고 성인의 성덕과 순교 정신을 기리고 본받기 위한 장을 마련하였습니다. 2009년부터 주차장 공사를 시작으로 솔뫼 성지는 다시 한 번 대대적인 정비에 들어가 성지의 위상에 걸맞게 야외무대와 광장을 조성하고 성지를 집회와 순례, 기념 공간으로 나누어 순례자들이 성지 순례의 참 의미를 묵상하도록 단장했습니다. 노후화된 솔뫼 피정의 집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13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 공연장이자 문화공간인 솔뫼 아레나를 건립해 2011년 5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4년 8월 15일에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곳을 방문해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한 청년들과 만남을 가졌고, 2014년 9월 25일에는 ‘당진 솔뫼마을 김대건 신부 유적’이 국가 지정문화재 사적 제529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나바위성지 나바위는 한국의 첫 방인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조국에 입국하며 첫발을 내디딘 축복의 땅입니다. 1845년 8월 17일 상해 금가항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그 해 8월 31일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모시고 작은 목선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길에 올라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긴 끝에 10월 12일 강경에서 조금 떨어진 황산포 나바위 화산 언저리에 닻을 내렸습니다. 화산 성당으로도 불리던 나바위 성당은 1897년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베르모렐 신부가 1907년에 완성했습니다. 설계는 명동 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공사는 중국인들이 맡았으며 건축양식은 한국인의 정서에 맞게 한옥 형태를 취했습니다. 그 뒤 1916-1917년에 흙벽은 양식 벽돌로, 기존 종탑은 헐고 입구에 고딕식 벽돌조 종탑을 세웠으며, 외부 마루는 회랑으로 바꿨습니다. 1922년 회랑 기둥 밑 부분을 석조로 개조했습니다. 한국의 전통양식과 서양의 건축양식이 혼합된 나바위 성당은 1987년 사제관과 함께 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성당 뒷산에는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가 피정을 하던 망금정이 있고, 그 옆 너럭바위 위에는 1955년 화강석으로 만들어 세운 김대건 신부 순교비가 있습니다. 성당 내부에는 김대건 신부의 성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제대와 각종 성물들은 중국 남경 성 라자로 수도원에서 제작해서 성당 건축 당시 들여와 조립 또는 설치된 옛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골배마실 골배마실 성지는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교우촌입니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와 골배마실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은 부모로부터 신앙생활과 교리를 배워 1836년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을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적인 재회를 한 곳도 골배마실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집터에는 성인 동상과 야외제대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은이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입니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입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습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2015년 8월 김가항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6년 9월 김대건 신부 순교 170주년을 맞아 새 성당 봉헌식과 바로 옆에 신축한 김대건 기념관에 대한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성장, 세례성사와 신학생 선발, 사제 수품, 사목 활동, 순교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성지로 거듭났습니다. 미리내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습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에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성당 뒤편으로 옮겨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수도회에서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의 관할권이 수원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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