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그룹 맞춤순례
|
땀의 순교자 최양업 토마스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 길과 뜻을 따라 묵상하며 3박4일 순례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께서 활동하신 전국 발자취를 기도하며 순례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특전►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차량 소독은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 및 차량내 소독제 비치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는 물론 차량 운영이 가능한 드라이브 스루 가이드가 함께하며 편안하게 모십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출발지는 함께 하는 신자분들의 각 위치를 고려하여 서울 경기 권역 내에서 적절한 위치로 확정 합니다. ►차량내 좌석은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본사에서 임의로 배정하오니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전일정 전용차량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석식) 4일차(조,중)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
►차량내 좌석은 본사에서 먼저 신청하신 분 부터 차례로 임의 배정 합니다.( 개인별 권한이 없습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청양 다락골 성지 청양 다락골 성지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입니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락골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791년 신해박해의 모진 서슬에 최양업 신부의 조부(祖父)인 최인주와 그의 어머니가 피난을 오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모자는 공토를 개간해 살림을 이어 갔는데 이때 그들이 개간했던 땅이 새터(新垈)로 점점 이웃이 모여옴에 따라 새로운 교우촌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최인주 슬하의 3형제 가운데 셋째가 최경환 성인으로, 그는 1821년 한국에서 두 번째 사제가 된 최양업을 6형제 중 장남으로 얻었습니다. 이들은 박해 시대에 드러내놓고 신앙생활을 하기에 어려움을 겪던 중 신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울로 이사를 하였고, 그 후 다락골의 교우촌 새터 마을 교우들은 대화재의 참화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2003년 대전교구는 청양 다락골 성지에 상주사제를 임명하여 성지 개발 및 보존, 순례자와 인근 교우들에 대한 사목을 담당토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구 설립 60주년을 기념하여 2008년 11월 9일 최경환 성인 일가와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 영성 및 선교 정신을 널리 현양하기 위한 기념성당을 다락골 성지에 건립하여 봉헌하였습니다. 또한 인근에 있는 새터, 최경환 성인과 최양업 신부의 생가 터에 박물관 겸 소성당도 마련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2019년 10월에는 성지 내에 최양업 신부 기념관을 건립해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도앙골 성지 중국에서 사제 서품을 받은 두 번째 한국인 사제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천신만고 끝에 1850년 1월 (혹은 1849년 말) 귀국하였다. 최양업 신부는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다음 곧 바로 전라도를 시작하여 공소 순방에 들어갔다. 1850년 10월 1일 최양업 신부는 9개월 동안 자신의 사목활동을 은사인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고했는데 이 편지의 발신지를 ‘도앙골’이라 명하고 있다. 이 편지에 신자들의 참담한 현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저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중에 지독한 가난에 찌든 사람들의 비참하고 궁핍한 처지를 자주 목격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저들을 도와줄 능력이 도무지 없는 저의 초라한 꼴을 보고 한없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저들은 포악한 조정의 모진 학정 아래 온갖 가렴주구(苛斂誅求)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동포들로부터 오는 박해, 부모들로부터 오는 박해, 배우자들로부터 오는 박해뿐 아니라 친척들과 이웃들로부터도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이루 형언할 수 없이 초라한 움막을 짓고 2년이나 3년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편안히 살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로 도앙골이 1850년 최양업 신부의 첫 사목 중심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봄에 복사꽃이 골짜기 양편으로 만발해서 도화골이라고도 불렀던 도앙골은 삽티, 내대, 서짓골, 거칠 등 여러 교우촌과 인접해 있고 전라도로 넘어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 남방제 성지 남방제 성지는 충남 아산시 신창면에 자리 잡고 있는 박해 시대의 교우촌 자리이다. 남방제 성지는 그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마을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수많은 가톨릭 신앙인들이 죽음으로 자신들의 믿음을 지켜낸 곳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들 가운데 성인의 반열에 오른 분은 한 분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신앙인이 태어나고 양육되어 영광된 순교의 관까지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하다. 이곳에서 순교하지 않았지만, 병인박해(1866년) 당시 순교한 성 조화서 베드로는 이곳에서 성가정을 이루고 아들 성 조윤호 요셉을 키웠다. 또한 교우촌 안에서 함께한 교우들의 도움으로 최양업 신부의 사목을 돕는 데 최선을 다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15년 수원 도마지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홀어머니를 모시고 신창 땅으로 이사하였다. 신창 남방제에서 한 막달레나와 결혼하였고, 1848년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았다. 하지만 아들 조윤호 요셉을 낳고 한 막달레나가 죽었고, 홀아비로 있다가 다시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의 성격은 쾌활하면서도 겸손하고 양순했으며, 신자의 본분을 충실하게 지켜 신자다운 몸가짐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 조 베드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 겸 마부로 선교 활동을 도와 전국의 신자촌으로 모시고 다녔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가 포졸들에게 잡혀 갇혔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마친 다음, ‘베르뇌 주교’(한국이름 장경일)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고자 길을 나섰다. 그 길에 최양업 신부가 과로에 장티푸스까지 겹친 아주 위급한 상황에 부닥쳤고, 성 조 베드로가 푸르티에 신부에게 이를 알려 병자 성사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원뿔 모양의 순교자 신앙비. 맨 위에 성 조화서 베드로와 성 조윤호 요셉상이 소나무 좌우에 세워져 있다. 최양업 신부의 선종 후 1864년 성 조 베드로는 가족들을 이끌고 전주 소양면 성지동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하고 착실하게 살고 있었다. 하지만 1866년 12월 5일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옥에 갇힌 성 조 베드로는 갇혀 있던 다른 신자들을 격려하며 평온한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도록 준비시켰다고 한다. 전라 감사는 성 조 베드로를 회유하기 위하여 온갖 협박과 함께 배교를 강요하였지만 “내 비록 이 세상에서는 죽어 없어지더라도 죽은 뒤 내 곧 새 세상에 가서 살게 될 것이요.”라고 응수하여 더욱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성 조화서 베드로는 1866년 12월 13일 전주 숲정이에서 세찬 칼을 세 번 받고 장엄하게 순교하였다. 성거산 성지 성거산 성지는 한국의 성지 중에서 차령산맥 해발 500m의 높은 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보기 드문 곳입니다. 성거산 주변에는 박해 당시 신앙의 선조들과 순교자들이 피신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던 삶의 터전(교우촌)이 7개가 산재되어 있어 선조들의 신앙의 향취를 물씬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1860년대부터 1920년 사이에 세워진 교우촌으로 서덕골, 먹방이, 소학동, 사리목, 매일골, 석천리, 도촌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소학골 교우촌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칼레 신부와 페롱 신부가 은거했던 곳이고, 박해가 끝난 뒤에도 많은 선교사들이 거처하거나 순방하던 곳입니다. 또한 병인박해 때 10명의 순교자가 탄생한 곳입니다. 그 중 5명은 공주 감영에서 참수형을 당했고, 5명은 서울 포도청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공주 감영에서 참수된 최천여 베드로, 최종여 라자로, 배문호 베드로, 고 요셉, 채 서방 며느리는 성거산 성지 제1줄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성지 전체로는 제1줄무덤에 38기, 제2줄무덤에 36기의 묘봉이 있는데, 시신(屍身)들이 겹쳐 있어 실제 안장된 순교자는 훨씬 많다고 합니다. 1959년 미군의 공군기지가 성거산 정상에 주둔하면서 도로를 개설할 때 도로 상의 묘봉 수가 107기였다고 하니, 이곳은 내포지방에 살다가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순교를 당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입니다. 성거산 성지는 2008년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등록되었고, 2011년 5월 성거산 아래 성지 초입에 성당과 수산나 피정의 집이 완공되어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배티성지 천혜의 피신처라 할 수 있는 배티는 충북 진천군과 경기도 안성시가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위치한 깊은 산골로 박해 시대 내륙 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1830년부터 본격적으로 교우촌이 형성돼 왔고 최양업 신부가 이 지역을 근거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 활동을 했습니다. 성지에는 1997년 봉헌된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과 오솔길을 따라 각각의 맷돌에 새겨진 14처, 그리고 2002년 봉헌된 ‘양업 영성관’(피정의 집)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성지에서 내려와 배티 고개를 향해 조금 올라가면 최양업 신부가 머물던 사제관 겸 성당이 있습니다. 1년 내내 도보로 전국을 다니며 사목하던 최양업 신부가 장마철에는 이곳에 머물며 “천주가사”를 집필했고 기도서인 “성교공과”를 번역했습니다. 1999년 최양업 신부의 성당 및 사제관 터를 확인한 후 그 부근의 농가를 헐고 2001년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했습니다. 이 집은 이미 1849년 페레올 주교의 명으로 다음해 다블뤼 신부가 설립한 조선교구의 소신학교로 사용됐던 곳입니다. 배티 고개 길을 따라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가면 배티에 숨어 신앙생활을 하던 선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안성으로 끌려가다 집단으로 순교한 14인의 무명 순교자 묘역이 있습니다. 배티를 중심으로 진천 일대에서 1866년 병인박해와 1868년 무진박해 때에 60여 명의 순교자가 났는데, 그 가운데 순교 행적이 전해지는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된 8명을 포함해 모두 34명에 이릅니다. 나머지는 배티 일대에 무명 순교자 묘소들로 산재해 있습니다. 청주교구는 배티 성지의 성역화와 최양업 신부의 영성을 본받고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양업 교회사연구소를 설립했으며, 2012년 4월 최양업 신부 선종 150주년 기념성당 봉헌식, 2014년 4월 11일 최양업 신부 박물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첨단 정보통신기술을 접목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꾸며졌습니다. 멍에목 성지 보은 멍에목은 복자 박경화 · 박사의 부자가 거주하던 교우촌이요, 최 양업 신부가 방문하여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고 미사를 봉헌한 공소였다. 그뿐만 아니라 1866년의 병인박해 이전까지 복자 김종륜, 순교자 최용운 회장과 안 루카, 여 요한 등이 비밀 신앙 공동체를 일구었던 천주교 성지다. 멍에목 성지에는 신앙 선조들의 믿음살이와 참 신앙이 짙게 배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섭리와 은총의 손길 아래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그 신앙으로 인해 박해자들의 형벌 아래 죽어야만 하였다. 오늘의 후손들이 은총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터전을 닦아 주신 분들이다. 청주교구는 2016년 8월 12일 멍에목 교우촌의 교회사적 의미를 반영하여 성지로 지정하고 담당 신부를 임명했다. 현재 멍에목 성지는 숨어 있던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살티 공소 살티 공소(1868년~)는 인근의 간월 공소와 대재 공소가 박해로 파괴되면서 설립되어 부산 교구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공소입니다. 박해 시대에는 수목이 울창하고 맹수가 많아 사람이 찾아 들기 힘든 은밀한 지역이었기에 신자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피난처였습니다. 혹독한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이후 안살티에 정착해 살던 신자들은 논밭을 일굴 수 있는 평지를 찾아 현재의 공소가 있는 살티로 내려와 교우촌을 이루며 살았습니다. 공소 인근에는 극심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杖毒)으로 고생하다가 1876년 살티에서 치명한 김영제 베드로의 묘가 있습니다. 후손들에 의해 순교자들의 신앙의 맥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살티는 초대 교회 때부터 이어온 교우촌이자 최재선 주교를 포함해 많은 성직자를 배출한 성소(聖召)의 고장입니다. 현재의 공소 건물은 1982년에 부산교구 은인들의 도움을 받아 건립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김영제 베드로 김아가타 묘 부산 지방 최초의 신자가 된 조부 김교희 프란치스코와 부친 김상은 야고보에게 신앙을 물려받은 김영제 베드로는 박해를 피해 부친과 함께 여러 교우촌을 전전하다가 간월로 돌아와 공소를 설립하고 1858년에는 공소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되어 한양까지 압송되었다가 풀려난 그는 1868년 무진박해 때 다시 체포되었고, 이때 많은 신자들이 붙잡혀 간월 공소는 물론 대재 공소 또한 소멸되었습니다. 김영제가 잡히면서 집은 불태워지고 가산은 몰수됐으며 가족들은 또다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대구에서 그는 전교 신부들의 행방을 묻는 관리들로부터 극심한 고문과 문초를 당했고, 이때 받은 고문으로 종지뼈가 으스러져 불구의 몸이 되었습니다. 한양까지 이송되었다가 9개월 만에 특별 사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피신한 가족들을 수소문해 안살티에 정착한 후 여기서 다시 살티 공소를 설립해 회장직을 맡기도 했으며, 박해가 뜸해지자 농사가 가능한 평지를 찾아 현재의 살티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혹독한 고문으로 인한 장독이 전신에 퍼지는 고통 속에서 살다가 결국 1876년 1월 24일 숨을 거두었습니다. 살티 공소 인근에 위치한 김영제의 묘소는 1981년 11월 언양 성당 신자들이 정성을 모아 말끔하게 단장하고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1994년 4월 부산교회사연구소 주관으로 서북쪽으로 약 18m 지점인 현재의 위치로 유해를 이장하고, 울산 본당 신자들의 후원금을 모아 분묘를 재단장하고 순교비를 건립하는 동시에 십자가, 제대, 예수 성심상, 성모상, 성지 표지석 등을 세웠습니다. 2008년 3월에는 간월에 있던 여동생 김 아가타의 묘를 김영제 묘 옆으로 이장하여 그해 9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나란히 자리한 남매 묘소 우측에 있는 가족묘 상단에는 부친 김상은과 모친 최 마리아의 묘도 있습니다. 언양 성당 경상도 남부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은 1815년 을해박해 이후로 추정하고 있으며, 언양 지역은 그보다 훨씬 더 늦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지역에는 경남 최초의 공소인 내간월 불당골 공소가 있었는데, 불당골은 김재권(프란치스코)이 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형성했던 곳입니다. 불당골은 선교사들을 맞이할 무렵 공소로 변모했으며, 최양업 신부와 다블뤼 주교가 방문하던 1850년대 말에는 언양 일대가 신자들의 집단 거주 지역으로 변모되어 간월, 죽림(대재, 죽령), 탑곡, 예씨네골, 진목정 등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언양 지역의 교우촌들은 병인박해 때 심한 타격을 입었지만 박해가 끝난 뒤 재건되면서 1882년 대구 본당의 주임으로 임명되어 경상도 지역을 담당하게 된 로베르 신부가 1883년 살티 공소를 설립하였고, 이듬해에는 언양읍 공소도 설립하였습니다. 언양 지역의 신자들은 이미 1888년부터 본당 설립을 위한 노력을 기울여 1926년 12월 5일 본당이 설립되고 초대 주임으로 보드뱅 신부가 부임했습니다. 보드뱅 신부는 즉시 성당 신축을 계획했고, 1929년 공사에 착수하여 1936년 10월 25일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여 드망즈 주교 집전으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보드뱅 신부가 직접 설계를 맡고, 명동 성당을 지었던 중국인 기술자들과 6년에 걸친 신자들의 노력으로 건립된 언양 성당(사제관 포함)은 고딕식 형태로 부산교구의 유일한 석조 건물입니다. 또한 성소의 온상지로 70여 명의 성직자와 수도자, 20여 명의 동정녀를 배출했습니다. 1986년 죽림굴을 찾아냈고, 1989년 새 사제관을 완공한 뒤 이듬해 12월 옛 사제관 자리에 ‘신앙유물 전시관’을 개관했습니다. 2004년 근대문화유산 제103호로 지정된 성당과 신앙유물 전시관은 700여 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성당 마당에서 대형 십자가가 세워져 있는 뒷산으로 올라가면 병인박해 순교자 오상선의 묘가 있고,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산 정상에 오르면 언양읍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아름다운 성모동굴이 있습니다. 진목정 성지 경주 진목정에는 허인백 야고보, 이양등 베드로, 김종륜 루카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범굴과 울산 장대에서 순교한 후 시신이 안장되었던 의묘가 있습니다. 이양등은 울산 죽령 교우촌의 회장으로 병인박해를 피해 이주해 온 허인백과 김종륜을 만나 서로 권면하면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때까지도 이곳은 비교적 안전했지만 2년 뒤인 1868년 포졸들이 교우촌에 들이닥쳐 경주 진영으로 끌려간 세 순교자는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은 후 사형선고를 받고 울산 장대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이들이 순교한 후 허인백의 부인 박조예는 순교자들의 시신을 거두어 장대 인근의 강둑 아래에 안장했고, 박해가 끝난 후인 1907년 박조예의 확인을 거쳐 순교자들의 유해가 발굴되어 유족들에 의해 경주시 산내면 진목정 뒷산인 도매산에 안장되었습니다. 그 후 1932년 5월 말 순교자들의 유해는 월배동 감천리에 있는 교회 묘지로 옮겨졌고, 1962년 10월 교회 묘지 산상에 있는 성모상 앞의 석함에 옮겨 안치되었다가, 1973년 10월 대구시 동구 신천 3동에 있는 복자 성당 구내로 옮겨 안장되었습니다. 세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세 순교 복자가 묻혔던 도매산 아래에는 오래된 진목 공소가 있고, 공소를 지나 약 7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1932년까지 세 순교자가 안장되었던 묘지가 있습니다. 대구대교구는 경주 산내 본당에서 진목정에 이르는 도보 순례길을 조성하고, 진목 공소와 순교자들의 묘지 인근에 개인과 가족 위한 피정의 집을 세우고, 세 순교자의 묘지 위에 순교자 기념성당을 건립하고자 2014년 5월말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3년의 공사 끝에 2017년 5월 진목정 순교자 기념성당과 하늘원(봉안당)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진목 공소에서 약 3.6km 떨어진 단석산(소태리 단수골)에는 세 순교자가 박해를 피해 숨어 살았다는 범굴이 있습니다. 소태골 피정의 집에서부터 시작되는 십자가의 길을 따라 산을 오르면 범굴에 이르게 됩니다. 구룡공소 구룡 공소는 청도군 운문면 마일리, 정상리와 경상군 용성면 매남리 및 영천군 대창면 용호리와 경계 지점에 있는 구룡산(675m)의 산정에 위치한 깊은 산골의 교우촌이다. 진목정 공소와는 불과 15∼20km의 거리에 있다. 이 깊은 산골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그러나 1815년 을해박해 때 청송 노래산 등지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구룡산 바로 아래 임진왜란 때의 피난지였던 자인현의 구룡(현 경산군 용성면 매남 3동 큰골의 기방우)에 교우촌을 이루어 살다가 다시 박해를 만나자 박씨 등이 이곳 구룡산 정상으로 다래덩굴을 헤치고 들어와 교우촌을 이루어서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선의산의 신자들과 서로 내왕을 하면서 프랑스 신부들의 방문을 받아 성사를 보고 신앙생활을 했다고 한다. 살티의 순교자 김영제 베드로도 병인박해 때 간월에서 체포되어 경주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9개월간 감옥에 갇혔다가 마침 나라의 경사로 풀려난 후 이곳 자인골 용성면 매남 3리(큰골)로 와서 3년간 살다가 다른 신자들과 함께 다시 언양의 안살티로 가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감옥에서 매를 맞아 생긴 종지뼈의 상처로 3년간 더 고생을 하다가 1875 년에 그 후유증으로 치명하였다. 또한 병인박해 중(1866∼1873)에는 영천군 대창면 효일 부락에 살던 이규일(1835∼1880)이라는 신자가 박해를 피해 단신으로 이곳 구룡 공소에 와서 살다가 188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대구대교구 무학중고등학교 교장이었던 이임춘 신부의 증조부인 이종건(1837∼1900)도 산 아래 용성면 매남리에 살다가 이곳 구룡 공소의 박씨 가정의 딸과 혼배를 하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고, 지금도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또한 그 무렵에 이종건의 친척인 이종선 가정과 김종화 야고보 회장 가정, 그리고 최순집 회장의 부친인 최팔영 아오구스티노 가정도 이곳으로 피난 와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병인박해 후 1882년 경상도 지방을 순회 전교하던 로베르(Robert, 金保祿, 1853~1922, 바오로) 신부가 이곳에 와서 판공성사를 주었을 때는 공소 신자가 60명이었으며, 그중에 53명이 고해성사를 보았고 50명이 영성체를 하였으며 6명의 외교인이 세례를 받았다고 교세 통계표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후 1893년 11월에는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언양, 선필, 진목정, 의실 공소 들을 방문한 후 이곳 구룡 공소와 자인 큰골 공소(용성면 매남리)에서 성사를 집행하였다. 신나무골 성지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 위치한 신나무골은 1800년대 초기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의 정착촌으로, 이선이(엘리사벳) 순교자의 무덤이 조성돼 있는 성지다. 뮈텔 주교(Gustave Charles Marie Mutel)와 리델 주교(Felix-Clair Ridel)가 직접 방문해 성사를 집행한 곳이며, 최양업 신부와 성 샤스탕 신부(Jacques Honor Chastan)가 사목방문을 한 곳으로도 추정된다. 특히 전주(현 전동)를 비롯해 부산(현 범일)·가실본당 등의 모태가 된 영남지역 신앙의 요람으로 꼽힌다. 신나무골 성지는 그동안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이 관할하며 1, 2차에 걸쳐 개발한 바 있으며, 2015년 대구대교구로 이관됐다. 진안리 성지 소백산맥의 문경 지방과 충청도의 경계지역에 있는 조령(일명 새재)는 예로부터 영남에서 서울로 가는 통로이며 군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요새였습니다. 그래서 숙종 34년에 이곳에 관문과 성벽을 축조했습니다. 이곳이 영남의 관문이기에 서울로 과거나 일을 보러가는 이들은 물론, 최양업 신부와 칼레 신부 등 선교사들과 교우들이 몰래 관문 옆 수구문을 통해 충청도와 경상도를 넘나들며 전교 활동과 피난길로 이용했던 유서 깊은 곳입니다. 특히 관문과 이화령 고개 갈림길에 위치한 진안리는 최양업 신부가 사목활동에 대한 보고를 위해 서울로 가다가 갑자기 병을 얻어 선종한 곳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 새터 교우촌에서 태어나 1836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최방제,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올라 1849년 4월 15일 상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품을 받고 한국의 두 번째 사제가 되었습니다. 귀국 후 그는 5개 도(道)의 산간벽지를 찾아다니며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고 성사를 집전했습니다. 진천 배티를 사목 중심지로 삼은 그의 활동은 12년 간 계속되었습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울주군의 죽림굴에서 3개월간 피신하기도 했으나 무사히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 방문을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습니다. 새재와 이화령의 갈림길인 문경 진안리의 오리터 주막에 들렀다가 식중독에 과로가 겹쳐 장티푸스 합병증으로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의 한 작은 교우촌에서 선종했습니다. 최양업 신부의 시신은 선종 후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교우촌에 가매장되었다가 그해 11월 초 배론 신학교 뒷산으로 옮겨져 안장되었습니다. 안동교구는 문경 성당을 중심으로 1999년 진안리 오리터에 마련한 356평 규모의 부지에 대한 토목공사를 시행하고, 2000년 5월과 11월에 대형 십자가와 돌 제대를 설치했습니다. 이어 조경공사를 마친 후 2002년 9월 29일 안동교구 권혁주 주교의 주례로 성지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그 이후로도 십자가의 길을 조성하고 제대 뒤에 조형 벽체를 세우는 등 순례자를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시성 절차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배론성지 배론 성지는 박해를 피해 산과 계곡으로 숨어든 교우들이 모여 이룬 교우촌으로 주로 옹기 굽는 일을 하며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앞길이 창창했던 황사영은 천주교의 오묘한 이치에 매료되어 세례를 받은 후에는 벼슬길도 마다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배론으로 들어왔습니다. 그해 8월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고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 썼는데, 그것이 황사영 백서입니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혀 황사영도 대역무도의 죄인으로 극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옹기 토굴 옆에는 1855년 장주기 회장의 초가집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복원되어 있고, 그 뒷산에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의 묘소가 있습니다. 이렇듯 배론 성지는 교회사적으로뿐만 아니라 문화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으로, 2001년 3월 2일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합니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2002년 10월에는 성지 초입에 순례자들의 집을 봉헌하였고, 2004년 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해 봉헌하였습니다. 2005년 피정의 집으로 사용되는 순교자들의 집을 새로 단장해 축복식을 가졌고, 2010년 9월에는 신자들에게 문화와 영성을 교육하고 교구 교회사와 영성을 기록 · 보관 · 연구함으로써 교회와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기틀이 될 ‘문화영성연구소’를 설립하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2018년 3월에는 성지 내에 은총의 성모 마리아 기도학교 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수리산 성지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했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 불렸습니다. 박해시대 외부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던 수리산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습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으로 3대째 신앙을 지켜왔으나 장남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고 전교회장직을 맡아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과 어린 자녀들까지 모두 옥에 갇혔습니다. 어린 자식 때문에 잠시 배교하겠노라 말했던 이성례는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옥을 찾았습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하였고, 그 이듬해 1월 31일에는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고, 조금 올라가면 2008년에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하는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있고, 고택 왼쪽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 묘소가 나옵니다. 성인 묘소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성모 동굴과 야외미사를 위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