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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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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경기 → 2박3일 알차고 거룩한 순례 걷고 기도하며 신앙 선조들의 발자취를 묵상하는 도보성지순례 2박3일 신앙을 지키기 위해 함께 걸었던 신앙 선조들의 거룩한 발자취를 도보로 순례하는 일정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상품특전
►노쇼핑 노옵션 노팁으로 진행합니다. 경건한 마음으로 성지순례에 함께해 주세요. ►쾌적하고 깔끔한 숙박 ►깔끔하고 정갈한 식사로 성지순례 활동에 에너지를 만들어 드립니다. ►각종 바이러스 걱정 없는 손 소독제 비치는 물론 참가하신 신자분들 개별 체온 측정을 해드립니다. ►출발 부터 성지 관련 안내 가이드가 함께하며 도보 순례를 진행합니다. ►소수인원으로 현지 성지 미사에 참여 할 수 있는 경우에만 성지 미사 함께 합니다. 포인트
►출발지 혜화역에 집결하여 도보로 함께 이동합니다. ►다리가 불편하신 분은 도보 순례 이동이 어려우므로 이점 양해 바랍니다. ►개인 안전을 위해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해 주시고 개인 건강상태에 대해 성지순례 참여 전 꼭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포함사항
► 전일정 도보이동 ► 숙박비 ► 1일차 (중,석식) 2일차 (조,중 석식) 3일차 (조,중) ► 성지순례 일정에 포함된 모든 일정 ►여행자 보험 최대 5천만원 보장 . 불포함사항
►싱글 비용 ►개인 간식 및 음료,물, 주류 포함외 식사 및 입장료 ►미사 봉헌시 봉헌비 및 예물 특이사항►도보 이동으로 편안한 운동화를 착용해 주시면 순례 내내 편안합니다 ►숙박 룸메이트의 경우 정해서 오신 분들은 맞추어 배정해 드리나 동행이 없으신분은 임의로 배정해 드립니다. ►다른 신자분들의 안전하고 쾌적한 성지순례 진행을 위해 진행자 요청에 적극 협조해 주시고, 특히 출발전 반드시 건강 상태를 체크해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 사정으로 순례 참가 취소가 필요한 경우 평일 오전 9시에서 오후 6시 상담 가능하며, 주말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은 상담이 불가 하오니 이점 참고 바랍니다. ►현재 소그룹 패키지 상품으로 4-8분 참가 기준 운영하고 있습니다. 단독 희망시 별도 문의 주시기 바랍니다. 쇼핑센터no쇼핑 일정표
중림동 약현성당 한국 천주교회 200여 년의 역사 중 신앙의 자유가 인정된 이후 100년의 역사를 대변하고 있는 성당이며, 한국 천주교회를 태동시키고 이끌어 온 순교자들의 피와 44위의 성인을 탄생시킨 신앙의 못자리인 서소문 밖 순교 성지 주변에 세워진 성지 순례 기념 성당이다.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뒤 서울에서 천주교 신자가 증가하자 1887년에 블랑(Blanc, 白圭三, 1884~1890, 요한) 주교는 이곳 순화동의 수레골에 교리 강습소를 설립하여 강당을 짓고 교리를 가르쳤는데 이것이 공소가 되었다. 1890년에 이르러 문밖 공소가 문안 본당(종현, 지금의 명동)을 능가하게 되었다. 문안이 586명이요, 문밖이 950명이었다. 1890년 블랑 주교는 직접 맡아보던 종현 본당을 두세(Doucet, 丁加彌, 1853~1917, 가밀로) 신부에게 맡겼고, 두세 신부는 블랑 주교가 별세한 뒤 새로 부임한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에게 문밖에 새 본당을 증설할 필요성을 설명하였다. 이를 위임받은 두세 신부는 이미 매수한 대지에 1891년 10월 27일에 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당시 부주교이던 코스트(Coste, 高宜善, 1842~1896, 요한) 신부는 약현 성당을 설계하고 직접 건축을 지도하였다. 정초식이 있은 지 1년 만에 준공되었으나 프랑스에 주문했던 종이 도착하지 않았고, 가을에 피정을 계기로 신부들이 모이는 기회에 축성식을 성대히 하기 위하여 1893년 9월 25일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이 성당이 자리 잡은 언덕이 서소문 밖 약현이었기 때문에 약현 성당으로 불렸다. 구조는 삼랑식의 약식화된 고딕 양식으로서 정면은 어칸과 협칸의 구별이 나타나지 않으며 건물이 낮은 관계로 고딕 건물의 특색인 뾰족아치를 쓰지 않고 둥근 아치를 쓰고 있다. 서소문밖 네거리 순교성지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는 새남터와 더불어 조선 왕조의 공식 처형장이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이래 이곳에서 순교하신 분 중 신원이 확인된 분만도 100명이 넘습니다. 이 가운데 44위가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 행사를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단일 순교지로는 가장 많은 성인을 배출한 곳입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추진한 124위 초기 순교자와 증거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에 대한 시복절차에 강완숙 골룸바를 비롯한 서소문 순교자 27위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었었고, 이들은 모두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이날 교황은 시복미사에 앞서 서소문 순교성지를 참배하여 순교자들의 정신을 기렸습니다. 중림동약현 성당(옛 약현 성당)은 1891년 서울에 두 번째 본당으로 설정되었고, 1898년에 완공된 명동 성당(옛 종현 성당)보다 6년 앞선 1892년 한국교회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축물로 완공되었습니다. 1905년 종탑 꼭대기에 첨탑을 올렸고, 1921년에는 성당 내부 칸막이를 철거하고 벽돌기둥을 돌기둥으로 교체하였습니다. 1974년부터 대대적인 해체 복원공사를 통해 1977년 사적 제252호로 지정되었으나 1998년 한 취객의 방화로 소실되어 1년 6개월의 재복원공사 끝에 2000년 9월 건립 당시 원형에 더 가깝게 복구하여 다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서소문 순교성지를 품 안에 두고 있는 성당으로서 1991년 본당 설정 100주년을 맞아 서소문 순교자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1999년에 서소문 공원 안에 1984년에 건립되었다가 1997년 철거당한 순교자 현양탑을 새로 제작하여 세웠습니다. 2009년 9월 13일에는 기존의 피정의 집으로 쓰던 곳을 증개축하여 서소문 순교성지 전시관으로 새롭게 개관하였습니다. 한편 2011년 서울대교구가 '서소문 밖 역사유적지 관광 자원화 사업'을 제안하고 정부와 지자체의 협조로 2019년 서소문역사공원(지상)과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지하)을 조성해 5월 29일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 축성식을 거행하고 6월 1일부터 박물관을 개관했습니다. 김범우 집터 한국 천주교 최초의 증거자로 불리었고 최근에는 순교자로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 김범우(金範禹, 1751~1787, 토마스)는 서울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다. 김범우는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영세를 받고 돌아온 해 가을 또는 겨울에 수표교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의 집에서 평소 친분이 있던 이벽의 가르침과 권면으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하였다. 입교한 후 매우 열심한 신앙생활을 했고 가족과 역관 친구들을 가르쳐 입교시키고, 윤지충 등에게 교리를 전하거나 교회 서적을 빌려 주었으며, 스스로 교리를 철저히 실천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해 겨울부터는 자신의 집을 신자들의 집회소로 제공함으로써 ‘명례방 공동체’가 탄생하도록 하였다. 김범우는 1785년 봄 명례방 집회로 집회의 중심인물이던 이승훈(李承薰, 1756~1801, 베드로), 이벽(李檗, 1754~1785, 세례자 요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요한), 권일신(權日身, 1742~1792,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권철신(權哲身, 1736~1801, 암브로시오) 등과 함께 형조의 관리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집주인이었던 중인(中人) 김범우는 가혹한 형벌을 당하고 지방으로 도배(徒配, 도배는 단순히 그냥 유배-귀양가는 것이 아니라 귀양 가서도 편히 있지 못하고 강제 노역이 부가된 형태의 처벌)되어 그곳에서 형벌의 여독으로 약 1~2년 후 36~37세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현재 명례방을 알리는 표지석은 없고 중구 을지로 2가 181 외환은행 앞 장악원 터 표석 자리 앞쪽을 김범우의 집 터로 보고 있다. 김범우의 묘소는 밀양군 삼랑진읍 용전동 산 102번지 만어산 중턱에 있다. 명동 주교좌성당 명동 대성당은 서울대교구 주교좌성당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본당이자 한국교회의 상징으로 1784년 이곳 명례방에서 최초의 신앙 공동체가 성립되었습니다. 그 후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다음 블랑 백 주교가 종현의 땅을 부분적으로 매입하여 성당건립을 시도하던 중 신자수의 증가로 1892년 약현(현 중림동약현) 성당을 분가하고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했습니다. 1896년 건립 도중 코스트 신부가 선종한 후 후임인 프와넬 신부가 성당 건축을 마무리하여 1898년 5월 29일 축성식을 갖고 한국교회의 주보인 원죄 없으신 성모 마리아께 성당을 봉헌했습니다. 1900년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1901년 기해박해 순교자들의 유해를 용산 신학교로부터 받아 지하성당에 모셨고, 1909년에는 왜고개에 매장되어 있던 순교자들의 유해를 지하성당에 안치했습니다. 1927년 백동(현 혜화동) 성당을 분가하고, 1939년 문화관을 신축하였으며, 1945년 광복을 맞아 성당명을 종현 성당에서 명동 성당으로 변경하였습니다. 기공 후 12년 만에 완공된 명동 대성당은 순수한 고딕 양식 건물로 그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받아 사적 제258호로 지정되었습니다. 2009년 초 6년여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마무리한 명동 대성당은 2010년 성당 보존과 시민에게 열린 광장 조성 및 사목 지원공간 확보를 위한 명동성당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2011년 9월 1단계 기공식을 가졌습니다. 3년의 공사 끝에 1단계를 마무리하며 2014년 9월 교구청 신청사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광화문 성지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교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가까운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보통 시복 미사는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교황을 대리하여 거행하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땅 한국에 와서 직접 시복미사를 집전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린 시복식이었다. 2015년 8월, 124위 복자 시복 1주년을 기념하여 표석(바닥 돌)을 설치 하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조규만ㆍ정순택ㆍ손희송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한 가운데 기념 표석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축복식을 거행했다. 가로 170㎝, 세로 100㎝ 크기로 제작된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 한문,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기념 표석 관리는 세종로본당에서 맡았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젊은이들의 활기가 넘치는 대학로 뒤편 낙산 산등성이 위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신학도들의 못자리인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신학교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어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설립된 성 요셉 신학당에서 시작된 가톨릭대학교의 역사는 박해를 이겨내고 1885년 강원도 여주군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설립하였고, 2년 뒤인 1887년에 서울 용산으로 신학교를 이전하였습니다. 1942년 일제에 의해 용산 신학교가 강제로 문을 닫기도 했지만, 해방과 함께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문을 열었고,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54년 가톨릭대학 의학부라는 이름으로 의학대학이 설립되었고, 1995년에는 성심여자대학교와 통합하여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었습니다. 2015년에는 개교 16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고 새로운 도약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종로 성당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고, 본당의 수호성인 또한 ‘포도청 순교 성인들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던 서울 좌 · 우 포도청 순교지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표석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묘동 56번지(옛 단성사 자리)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구 종로 1가 89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여 2013년 9월 2일 염수정 대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으며, 성당 외벽에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여 설치한 청동부조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 제막식도 가졌다. 아울러 종로 성당에서 시작하여 좌우 포도청 터 등을 거쳐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에 이르는 2개의 도보순례길 코스를 제시하였다. 이벽의 집터 한국 천주교회의 최초의 영세자인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1756~1801)은 북경 북당(北堂)에서 예수회 선교사 그라몽(Grammont, 梁棟材, 1736~1812, 요셉) 신부에게 1784년 2월경 세례명을 베드로로 정하고 세례를 받고 귀국, 그해 9월(음력)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과 권일신(權日身,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42~1792), 정약용(丁若鏞, 요한, 1762~1836) 등에게 세례를 주었다. 다시 이벽으로 하여금 최창현(崔昌顯, 1759~1801, 요한), 최인길(崔仁吉, 1765~1795, 마티아), 김종교(金宗敎, 1754~1801, 프란치스코) 등에게 세례를 베풀게 하여 신자 공동체를 형성시켜 이들과 함께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하였다.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에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천주교 첫 신앙공동체가 출발하게 되었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서울시의 협조를 얻어 한국 천주교회가 창립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당시 이벽의 집이 서울 수표교, 현재의 서울시 중구 수표동 43번지와 종로구 관수동 152번지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의 기록에 근거해 그 근처에 기념 표석을 건립했다. 표석은 현재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05 건물 ‘두레시닝(주)’ 앞 현 삼일교와 수표교 사이 청계천변 인도에 세워져 있다. 이벽의 집은 수표교 남쪽, 현 기념표석 청계천 건너편으로 추정되나 마땅한 자리가 없어서 이곳에 설치했다. 좌포도청터, 우포도청터 조선 중종 때인 16세기 초 서울과 인근 지역의 포도와 순라를 담당하도록 설치한 기관으로, 임금 거동시의 호위를 맡거나 유언비어 유포, 위조 엽전 제조, 도박, 밀주 행위 등을 단속하였다. 포도청은 이후 350여 년간 존속되다가 갑오개혁 때인 1894년 7월에 폐지되었으며, 이후 경무청으로 개편되었다. 서울 파자교(把字橋) 동북쪽(현 종로구 묘동 56번지) 즉 옛 단성사 자리에 있던 좌포도청에서는 서울의 동부 · 중부 · 남부 지역과 경기좌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우포도청은 혜정교(惠政橋) 남쪽(현 종로 1가 89번지) 즉 광화문우체국과 일민미술관(옛 동아일보사) 사이에 있었고, 서울의 서부 · 북부 지역과 경기우도 일대의 순라를 담당하였다. 경기좌도는 지금의 강화 · 인천 · 수원 · 양평 · 광주의 이남 지역을 말하며, 경기우도는 지금의 고양 · 파주 · 양주 · 가평 이북 지역을 말한다. 이중에서 천주교 신자들은 대부분 좌포도청의 관할 구역인 경기좌도에 거주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우포도청보다는 좌포도청에서 훨씬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하였다. 전옥서터 조선 시대에 죄인을 수감하였던 감옥으로 문종 때 전옥서로 개칭하였다. 전옥서는 감옥과 죄인에 관한 사무를 관장했던 관서였다. 전옥서의 옥사는 남자 옥사와 여자 옥사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남옥과 여옥은 각각 담장이 둘러져 있고 각 담장에 출입문이 있었다. 또 죄의 크고 작음에 따라 분리 수용하도록 하였다. 박해시기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이송되어 심문을 받고, 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관검 등이 형조에서 의금부로 이송되었다가 전주에서 참수되었고, 강완숙 골롬바, 최필제 베드로, 김현우 마태오 등은 형조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에서 순교하였다. 기해박해 때에는 남명혁 다미아노 성인과 정정혜 엘리사벳 성녀가 형조에서 심문을 받은 후 참수되었고,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은 의금부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처형될 때까지 전옥서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이호영 베드로 성인은 4개월 동안 전옥서에 갇혀 있다가 옥사하였다. 병인박해 때에도 많은 순교자들이 전옥서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전장운 요한 성인과 최형 베드로 성인 등은 의금부에서 신문을 받은 후 형조로 이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서소문밖에서 참수되었다. 전옥서 터 표지석은 지하철 1호선 종각역 6번 출구 도로 쪽 화단에 있다. 의금부터 의금부는 조선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다. 조선의 군사체제가 정비되면서 의금부 기능은 축소되어 정치범이나 중죄인 등을 다스리는 사법 전담 기관이 되었다. 의금부는 한양부 견평방(堅平坊)에 있었는데, 현재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인근의 SC제일은행 화단에 표지석이 서 있다. 천주교 박해시기, 천주교 신자들 중 중죄인, 즉 주교와 신부, 평신도 지도자들은 임금의 특별한 명령으로 의금부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박해 당시, 이승훈(베드로, 1756-1801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1759-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 등 많은 천주교 신자가 의금부에서 고초를 겪었다. 한국 천주교 순교자124위 시복터 광화문 광장은 조선시대 의금부, 포도청, 서소문 형장 등 한국 교회 순교자들이 목숨을 바친 장소들과 가까운 곳이다. 2014년 8월 16일 한국 천주교회사에 길이 남을 역사적 순간인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이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거행되었다. 보통 시복 미사는 교황청 시성성 장관이 교황을 대리하여 거행하는데,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순교자의 땅 한국에 와서 직접 시복미사를 집전하였다. 하느님의 종 124위 시복식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세 번째로 열린 시복식이었다. 2015년 8월, 124위 복자 시복 1주년을 기념하여 표석(바닥 돌)을 설치 하였다. 서울대교구 순교자현양위원회는 광화문 북측 광장에서 교구장 염수정 추기경 주례로 조규만ㆍ정순택ㆍ손희송 주교와 사제단이 함께한 가운데 기념 표석 ‘한국 천주교 순교자 124위 시복터’ 축복식을 거행했다. 가로 170㎝, 세로 100㎝ 크기로 제작된 기념 표석에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년 8월 16일 이곳에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복자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놓습니다”라는 글이 한글과 영문, 한문, 스페인어로 새겨져 있다. 기념 표석 관리는 세종로본당에서 맡았다. 가회동 성당 서울대교구 소속 본당(순례지). 서울시 종로구 북촌로57(가회동 30-3) 소재. 1949년 9월 명동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주보는 선교의 수호자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였으나, 2014년 124위 시복식을 계기로 복자 주문모(周文謨) 야고보와 복녀 강완숙(姜完淑) 골롬바를 공동 주보로 정해 2018년 3월 30일 교구장의 승인을 받았다. 가회동 성당이 위치한 북촌 일대는 최초의 선교사인 복자 주문모 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밀입국해 1795년 4월 5일 부활 대축일에 복자 최인길(崔仁吉) 마티아의 집에서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집전한 곳이다. 그리고 본당 관할구역 또한 주문모 신부가 복녀 강완숙 골롬바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펼쳤던 지역으로 한국 교회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형조터 조선시대의 중앙 행정조직의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의정부와 6조이다. 의정부는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합좌기관으로 3정승은 나라의 중요한 정사를 논의하고 그 합의를 거쳐 국왕에게 품달하며 왕의 결재는 의정부를 거쳐 해당관서에 전달되었다. 6조는 의정부 아래의 나라의 행정 실무(정무)를 나누어 맡은 기관으로 이부, 호부, 예부, 병부, 형부, 공부가 있으며 그 장관을 판서, 차관을 참판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형부가 형조이다. 형조는 한성부 서부 적선방에 있었는데,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많은 천주교인들이 형조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다. 그 시작은 정조가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1785년에 발생한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신자들이 명례방에 있던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집회를 갖던 중, 형조의 금리들에게 발각되어 형조로 압송된 사건이었다. 이후 1801년 신유박해 때에는 최필공 토마스, 최필제 베드로, 윤운혜 루치아, 정철상 가롤로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고, 김천애 안드레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윤지헌 프란치스코 등은 전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에는 이광헌 아우구스티노, 남명혁 다미아노, 김효임 골롬바, 김효주 아네스, 김제준 이냐시오 성인 등이 형조에서 문초를 받았으며,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전장운 요한, 최형 베드로 성인 등도 형조를 거쳐 갔다. 형조 터 표시는 5호선 광화문역 세종문화회관에서 세종로공원 쪽 도로 바닥에 매립되어 있다. 경기감영터 감영(監營)은 각 도의 관찰사가 기거하는 관청을 말한다. 관찰사(감사)는 조선시대 지방 행정의 최고 책임자로, 관할 지역 내에서 군사 · 행정 · 감찰 · 사법권을 행사했다. 경기감영은 경기 관찰사가 있었던 곳이다. 현재 서울적십자병원 정문 옆 도로변에 표지석이 서 있다. 1784년 조선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경기 지역에는 신자들이 크게 증가하였다. 점차 확산되어 가던 경기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1801년 신유박해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체포된 신자들이 경기감영으로 이송되어 혹독한 형벌과 문초를 받았는데, 이 과정에서 조용삼(베드로, ?-1801년)이 순교했다. 조용삼은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년)의 문하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웠는데, 몸이 쇠약했음에도 혹독한 형벌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했다. 그는 마지막 형벌 때 “하늘에는 두 명의 주인이 없고, 사람에는 두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천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뿐이며, 다른 말씀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라고 박해자들에게 신앙을 고백하였다고 전해진다. 조용삼은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노고산 성지 노고산은 천주교 박해 때 여러 처형장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이유로 많은 순교자들의 시신이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입니다. 현재 노고산 일대에는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서강대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땅 위에 학교 부지를 마련한 서강대학교는 2009년 6월 15일 기해박해 당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노고산에 4년 동안 매장되었던 앵베르 주교와 모방 · 샤스탕 신부를 기리기 위해 정문에서 가까운 가브리엘관 앞 소나무밭에 세 성인의 순교 현양비를 세우고 정진석 추기경의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하였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 한강변에 우뚝 솟은 봉우리의 모양이 누에가 머리를 든 것 같기도 하고 용의 머리 같기도 하다고 해서 잠두(蠶頭) 또는 용두(龍頭)로 불리던 서강(西江) 밖의 봉우리가 절두산(切頭山)이 된 데에는 가슴 시린 아픔이 있습니다. 대원군이 자신의 쇄국정책을 유지하기 위해 무자비한 살육을 자행함으로써 당시 절두산에서는 수많은 교우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선참후계(先斬後啓) 식으로 무명의 순교자들이 아무런 재판의 형식이나 절차도 없이 처형되었고, 그래서 29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1966년 병인박해 100주년을 기념해 순교터에 성당과 순교 기념관을 건립을 시작해 이듬해 10월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우뚝 솟은 절벽 위에 3층으로 세워진 기념관은 우리 전통 문화와 순교자들의 고난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절두산 기념관은 순례성당과 순교 성인 27위와 1위의 무명 순교자의 유해를 모신 지하 성해실 그리고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수많은 자료와 유물들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절두산 순교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를 대표하는 성지이나 인근 지역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속도로 훼손되자, 1997년 11월 교회의 노력과 정부의 지원으로 성지 일원을 '양화나루, 잠두봉 유적'이란 명칭으로 사적 제399호로 지정했습니다. 그동안 지방 문화재로 지정된 성지는 있었으나 국가 사적으로 지정된 곳은 절두산 순교성지가 처음입니다. 2000년 11월 말 절두산 순교 기념관과 꾸르실료 회관 사이에 이춘만 조각가의 웅장한 절두산 순교자 기념탑이 제작되어 설치되었습니다. 2001년에는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절두산 순교 박물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2004년 개축공사에 이어 2007년 첨단 시설을 갖춘 수장고를 설치하고, 2009년에는 전시장으로서의 역할보다 박물관 본연의 역할에 더욱 충실하기 위해 시설 보완을 거쳐 한국천주교순교자박물관으로 재개관했습니다. 용산 성심신학교, 용산 성직자묘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는 1855년 충청도 배론에 세워진 성 요셉 신학당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사제 양성을 위해 이미 정하상에게 신학교육을 시키고 1836년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를 마카오로 보내 신학교육을 받게 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로 배론 신학교는 폐교되었지만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 21명을 페낭 신학교에 유학생으로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1885년에는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열었지만 2년 뒤인 1887년에는 바로 이곳 서울 용산으로 이전하였습니다. 1892년에는 신학교 교사를 신축했고, 성당은 그 10년 후인 1902년에 신학교 부속 성당으로 건립되어 축성되었습니다. 신학교 성당은 지난 1982년 교사와 함께 사적 제255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습니다. 옛 용산 신학교 성당인 성심 성당은 많은 순교자들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곳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조선교구 초대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 2대 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 3대 페레올 주교, 4대 성 베르뇌 주교, 5대 성 다블뤼 주교, 6대 리델 주교, 7대 블랑 주교, 8대 교구장이자 이 성당 봉헌식을 집전한 뮈텔 주교에 이르기까지 8명의 역대 조선교구장 주교들의 유해가 모두 이 성당에 안치되었었고, 기해박해 순교자인 성 모방, 성 샤스탕 신부를 비롯해 배론 신학당을 세우고 병인박해 때 순교한 오메트르 신부, 성 위앵, 성 브르트니에르, 성 도리, 성 볼리외 신부 등의 유해도 이 성당을 거쳤습니다. 이곳에 안치되었던 순교자들의 유해는 그 후 혜화동 신학교 성당을 비롯해 명동 주교좌성당, 절두산 순교성지 등지로 옮겨 모셨고, 역대 교구장들의 유해는 용산 성직자 묘지로 옮겨 안장했습니다. 당고개 성지 당고개 순교성지는 서소문 밖 네거리, 새남터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성인을 탄생시킨 거룩한 땅입니다. 1839년 기해박해 당시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이들이 음력설 대목에 처형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따라 서소문 밖 형장을 피해 조금 한강가로 나간 곳이 당고개입니다. 이곳에서 1840년 1월 31일과 2월 1일 양일에 걸쳐 10명의 남녀 교우들이 순교함으로써 기해박해를 장엄하게 끝맺은 거룩한 곳입니다. 특히 이들 가운데 어린 자식을 거느린 세 어머니는 천주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서 모성애까지도 초월하고 순교의 월계관을 차지했습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박종원, 홍병주 · 홍영주 형제, 손소벽, 이경이, 이인덕, 권진이, 이문우, 최영이 등 9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당고개의 순교자이면서 최경환 성인의 부인이요, 최양업 신부의 어머니인 이성례만은 성인품에 오르지 못했습니다. 이는 어린 자식들을 모두 죽이고 말 것 같아 배교하겠노라고 옥을 나온 모정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례 마리아는 다시 남편 곁으로 돌아와 순교의 칼날을 받았고,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습니다. 서울시의 성지 인근에 대한 재개발로 인해 2008년 4월부터 대대적인 성지 재개발 공사를 시행한 당고개 성지는 3년여의 공사를 통해 관내 근린공원과 연계해 주변 환경과의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공원 명칭 또한 ‘순교 성인의 역사’가 깃든 신계 역사공원으로 변경되어 신자가 아닌 사람들도 순교자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거듭났습니다. 특히 성지 전체를 ‘어머니의 따뜻한 품’으로 형상화해 순교자들의 고통보다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신앙의 후손인 우리를 감싸주는 모성적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한옥과 황토토담을 이용해 고층 빌딩 한가운데 고향 마을처럼 포근함을 갖도록 재개발된 당고개 성지는 2011년 9월 4일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봉헌식을 거행했습니다. 새남터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프랑스인 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습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습니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습니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한옥 양식으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습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왜고개 성지 현재 군종교구청과 주교좌인 국군 중앙 성당이 자리하고 있는 왜고개는 한자로 와현(瓦峴) 또는 와서현(瓦署峴)으로 불리던 곳으로 원래 옛날부터 기와와 벽돌을 구워 공급하던 와서가 있었던 데서 유래합니다. 왜고개는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7명의 순교자가 33년간,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2명의 순교자가 43년간 매장되었던 유서 깊은 성지입니다. 또한 왜고개 성지는 1846년 9월 16일 병오박해 때 순교한 한국인 첫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시신이 잠시 모셔졌다가 박해가 진정된 후 미리내로 이장된 역사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통해 왜고개 성지는 모두 10명의 순교자가 묻혔던 곳으로 그 중 8명이 1984년 5월 6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따라서 왜고개 성지는 순교성인들이 쉬어간 자리이면서 동시에 그들의 삶과 정신을 느끼기에 충분한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사적 중요성과 순례자들의 기도를 돕기 위해 군종교구에서는 2013년 12월 순교자 현양비, 대형 십자가상, 십자가의 길, 기도처 등을 건립하여 성지를 확장하여 새 단장한 후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한국 순교자103위 시성터 서울대교구 한국순교자현양위원회에서는 2009년 9월 19일,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25주년 기념행사 때, 과거 시성식이 거행되었던 제단자리인 여의도공원 잔디마당에 기념 표석을 세워 그분들의 모범을 따르며, 온 민족과 누리에 그들의 신앙이 이 민족의 희망의 표징이 되도록 하였다.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기념표석 전면에는 “한국 순교자 103위 시성 터”라는 제목 아래 “이 땅에 빛을! 한국의 103위 순교자를 성인 반열에 올리노니, 세계 교회가 공경하기를 바랍니다.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라는 시성선언문 일부를 새겨 넣었다. 그리고 표석 후면에는 시성 선포의 역사적인 사실을 명기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처음으로 방문하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1984년 5월 6일 이곳에서 103위 한국 순교복자들을 성인 반열에 올려 이를 온 세상에 선포하신 것을 기리고자 이 돌을 세웁니다. 2009년 9월 1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추기경 니콜라오 정진석”이라는 문구를 한글, 불어, 영어로 각각 새겨 순례자들에게 기념지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수리산 성지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했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 불렸습니다. 박해시대 외부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했던 수리산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의 묘가 있습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으로 3대째 신앙을 지켜왔으나 장남이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이곳저곳으로 떠돌다가 마지막으로 정착한 곳이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습니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고 전교회장직을 맡아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과 어린 자녀들까지 모두 옥에 갇혔습니다. 어린 자식 때문에 잠시 배교하겠노라 말했던 이성례는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옥을 찾았습니다. 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하였고, 그 이듬해 1월 31일에는 부인 이성례는 당고개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고, 조금 올라가면 2008년에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하는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있고, 고택 왼쪽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 묘소가 나옵니다. 성인 묘소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성모 동굴과 야외미사를 위한 제대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손골 성지 손골 성지는 원래 교우촌이 있던 곳으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의 주된 선교지로, 성 도리 헨리코 신부가 사목하다 신자들을 모두 피신시킨 후 홀로 포졸들에게 체포된 곳일 뿐 아니라 성 오메트르 신부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입국해서 한국말과 풍습 등을 배우며 선교를 준비하고 활동하던 곳입니다. 이를 기념해 성 도리 헨리코 신부 동상, 십자가의 길, 경당과 기념관, 피정의 집, 도리 신부 순교비가 건립되었습니다. 수차례 변형 후 2014년 원래 모습으로 복원된 도리 신부 순교비 위에는 1966년 성인의 고향 본당에서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성인의 생가 벽에 나머지 하나는 손골에 기증한 돌 십자가가 부착되어 있습니다. 2013년 10월에는 손골에서 신앙생활하다 체포되어 서봉 인근 개울가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 4위의 유해를 미리내 무명 순교자 묘역에서 손골 성지로 옮겨 안치하고 순교자의 길을 조성하였습니다. 2015년 3월에 성 오메트르 신부 동상을 세우고, 2016년 5월에는 성지 설립 50주년과 병인박해 150주년을 기념해 새 성당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이어 2017년 5월 기존의 경당을 보수해 손골 기념관을 개관해 성지와 성인 관련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수원 성지 다산 정약용이 설계와 시공을 담당한 수원 화성은 그 후 천주교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자들의 처형지가 되었습니다.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 일대에서 체포당한 신자들이 취조와 고문을 당한 후 순교한 곳입니다. 둘레 5743m에 이르는 성곽 전체가 이름이 알려진 83위의 순교자와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을 껴안은 순교지입니다. 현재까지 화성 내부 십여 곳 이상이 순교지와 증거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수원교구장 최덕기 주교는 2000년 수원 화성에서 순교한 순교자들을 현양하기 위해 북수동 성당(구 수원 성당)을 중심으로 하는 천주교 수원 성지를 선포하였습니다. 수원 성지는 2차 시복시성 대상자로 선정된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 중 수원에서 순교한 17위의 하느님의 종과 무명 순교자들을 현양하고 있습니다. 은이 골배마실 성지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입니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입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습니다. 은이 공소의 교회사적 중요성을 인식한 양지 성당은 1996년 그동안 방치되었던 은이 공소터 일부를 매입하고 야외제대와 성 김대건 신부상을 세우면서 성지 개발을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을 맞아 시작된 ‘성 김대건 신부 기념관 건립 추진’ 운동에 이어 2002년과 2003년에 주변 땅을 추가 매입하고 사제관과 성당, 숙소 건물 등을 마련하였습니다. 이어 성지 전담신부 발령으로 본격적인 은이 성지 개발이 시작되었습니다. 2013년 김대건 신부가 세례 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은이 공소터의 부지를 추가로 매입하고, 2015년 8월 김가항 성당 복원과 김대건 신부 기념관 기공미사를 봉헌했습니다. 2016년 9월 김대건 신부 순교 170주년을 맞아 새 성당 봉헌식과 바로 옆에 신축한 김대건 기념관에 대한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이로써 은이 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과 성장, 세례성사와 신학생 선발, 사제 수품, 사목 활동, 순교에 이르는 생애 전반을 기억하고 묵상할 수 있는 성지로 거듭났습니다. 골배마실 성지는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교우촌입니다. 김대건 신부 가족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솔뫼에서 용인으로 와 골배마실에 정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소년 김대건은 부모로부터 신앙생활과 교리를 배워 1836년 15세의 나이로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성사를 받고 신학생을 선발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1845년 사제품을 받고 국내로 잠입한 후 어머니 고 우르술라와 감격적인 재회를 한 곳도 골배마실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성장한 집터에는 성인 동상과 야외제대 등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단내 성가정성당 단내 성가정 성지는 1866년 병인박해 때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정은 바오로의 고향이자 유해가 묻혀 있는 곳입니다. 박해의 회오리가 단천리 교우촌에 몰아쳤을 때 포졸들은 정은 바오로를 붙잡기 위해 매봉에 숨어 망을 보았고, 당시 63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추운 겨울날 낮에는 마을 뒤 ‘검은 바위’ 밑 굴속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내려와 잠을 자고 올라갔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어 남한산성으로 끌려갔고, 이때 그의 형님의 손자인 정양묵 베드로가 병든 작은 할아버지를 모시고자 자진하여 잡혀갔습니다. 배교 강요에 끝까지 굴하지 않은 그들은 그해 말 백지사형을 받고 순교했습니다. 그들이 순교한 뒤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 밖으로 시구문을 통해 던져졌는데 가족들이 몰래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찾아 이곳에 안장했습니다. 그러나 정양묵 베드로의 시신은 당시 함께 순교한 수많은 시신들 틈에 섞여 미처 찾아오지 못했습니다. 단내 성가정 성지는 한국에 존재하는 가장 오래된 교우촌 가운데 하나이며 김대건 신부의 사목활동지이기도 합니다. 아울러 한국 103위 순교 성인 가운데 이천에서 태어났거나 체포되어 순교한 5위의 성인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특히 단내가 가정성화를 위한 성가정 성지로 명명된 것은 성지에서 기념하는 5위의 성인과 순교자 중 이문우 성인을 제외하면 모두 가족 순교자이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에서는 2003년 기념성당과 5위 성인 순교비를 세우고, 지속적인 성지 개발과 성가정의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어농 성지 어농 성지에는 한국 교회에 최초로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중국을 세 번이나 왕래한 윤유일 바오로와 그 일가족의 묘가 있습니다. 1795년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던 윤유일, 지황, 최인길이 순교하고, 1801년 신유박해 때 윤유일의 가족 대부분이 순교하여 후손을 찾지 못하던 중 1987년에 한 후손이 나타나 그의 증언에 의해 이곳 선산에서 윤유일 바오로의 부친 윤장과 동생 윤유오 야고보의 묘를 확인했습니다. 이에 따라 윤유일과 숙부 윤현과 윤관수, 그의 사촌 누이동생 윤점혜와 윤운혜 그리고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온 주문모 신부 등의 의묘를 만들었고, 그 해 6월 28일 고 김남수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성역화를 시작했습니다. 그 후 어농 성지는 윤유일 일가 묘소를 중심으로 성지를 개발해 1999년 예수상과 십자가의 길 14처를 세우고, 2002년에는 사제관과 성당을 마련했습니다. 그 해 8월 13일 최덕기 주교에 의해 ‘을묘 · 신유박해 순교자 현양성지’로 선포된 어농 성지는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고 돕다가 치명한 을묘박해 3위 순교자와 주문모 신부를 모시고 6년 동안 조선 교회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순교한 신유박해 순교자 14위를 현양하고 있습니다. 이들 17위 순교자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습니다. 한편 어농 성지는 청소년들에게 선조들의 순교 영성과 성소를 불어넣어 주는 청소년 성지로 개발하고 있습니다. 미리내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었던 미리내 성지는 본래 박해 시대에 형성된 교우촌으로 1883년 공소가 설립되었다가 1896년 본당으로 승격되었고, 초대 주임으로 부임한 강도영 신부와 신자들에 의해 1907년 초 성 요셉 성당이 건립되었습니다. 1976년 성직자 묘지 상단에 수원교구 도처에 묻힌 무명 순교자 17위의 유해를 이장해 모셨는데, 그 중 이동면 묵리에서 이장해 모신 유해가 병인박해 때 순교한 이윤일 요한 성인으로 밝혀져 1986년 대구대교구로 천묘했습니다. 16위의 유해 중 서봉부락 돌무덤 순교자 4위가 2013년 손골 성지로 이장되어 현재는 12위의 무명 순교자 유해가 합장되어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시복에 맞춰 1928년 봉헌된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 기념경당'에는 성인의 유해 일부가 모셔져 있고, 경당 앞에는 왼쪽부터 강도영 신부, 김대건 신부, 페레올 주교, 최문식 신부의 묘가 나란히 있습니다. 경당 밖 왼편에는 김대건 신부의 어머니인 고 우르술라와 목숨을 걸고 김대건 신부의 시신을 빼내어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모시고 밤낮으로 돌본 이민식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1970년대 미리내 성지의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이 시작되어 미리내 천주성삼성직수도회와 성모성심수녀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고, 1980년대에 경당 옆 광장을 확장하고 십자가의 길 14처 조각을 세웠습니다. 1991년에는 103위 성인 시성 기념 대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기념성당 제대에는 성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었고, 2층 전시실에는 박해시대 천주교인에게 사용된 고문 형구와 순교 참상 모형 전시장이 설치되었습니다. 그 후 기념성당과 경당 사이에 성모당이 건립되고, 입구에서 경당까지 오르는 길에 웅장한 돌조각으로 묵주기도 길이 조성되었습니다. 그리고 14처 조각이 기념성당 초입에서 시작해 경당 전에 기도를 마칠 수 있도록 성당 뒤편으로 옮겨 설치되었습니다. 2005년 10월 25일 수도회에서 29년간 관리 운영해온 미리내 성지의 관할권이 수원교구로 이관되었습니다. 2015년 4월에는 성지 입구에 흰 대리석으로 한국 순교자 성인복자상 부조 작품을 제작해 설치했습니다. 죽산 순교성지 죽산은 조선 시대 이미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가 주님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친 순교성지입니다. 현재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해도 24명이나 됩니다.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많은 순교자들이 죽산 도호부에서 심문을 받고 모진 매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며 사형장으로 끌려가 순교의 깃발을 올렸습니다. 병인박해의 여파로 1968년 9월 28일 이곳에서 순교한 박경진 프란치스코와 오 마르가리타 부부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습니다. 병인박해 이후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 전혀 없었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줍니다. 이처럼 거룩한 순교터에 변변한 기념비 하나 없어 안타까워하던 죽산 성당 신자들은 포도를 팔아 모은 돈으로 죽산 도호부와는 약간 떨어져 있으나 잊은터로 불리며 처형지로 사용되었던 곳의 땅을 확보하여 성지 개발을 시작했습니다. 죽산 순교성지는 개발 단계부터 가톨릭교회의 성체 · 성모 · 순교자 신심을 고양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고풍스런 돌담으로 둘러싸인 성지 입구에 들어서면 순교자 묘역까지 가장자리로 묵주기도 길이 있고, 묘역 가운데 무명 순교자 묘를 중심으로 양쪽에 병인박해 순교자 묘 24기와 순교자 현양탑이 날개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순교자 묘역 뒤로는 십자가상과 십자가의 길, 소성당 그리고 옆에 대성당을 마련하여 2000년 9월 3일 최덕기 주교의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16년 9월 28일에는 죽산 순교성지에서 3.5km 거리에 있는 죽산면사무소 입구 쪽에 조성한 ‘죽산 도호부 옥사 순교성지’ 선포 및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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