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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그룹 맞춤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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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3일 알차고 거룩한 순례 영의 아버지와 생의 아버지를 믿고 따른 부자의 거룩한 순교 발자취를 찾아서 신앙 선조들 중 아버지와 아들이 한마음으로 믿음안에 순교한 성지를 찾아 순례 ![]() 상품기본정보
상품가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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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밖 네거리 순교성지 서소문 밖은 정부 사법기관인 형조·의금부와 가까워 부대시참(不待時斬)의 집행에 편리하였고,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칠패시장과도 인접하여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적합한 장소였다. 또한 조선시대 형장은 일반적으로 물가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서소문 밖에는 한강의 지류인 만초천이 흐르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시대 국가 공식 참형지(斬刑地)가 되었다. 이는 사직단 서쪽에 처형장을 두어야 한다는 ≪예기≫의 가르침을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1784년 가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일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는 수많은 천주교인이 처형을 당했다. 정조(1776~1800년) 사후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위협하는 존재로 인식된 천주교도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면서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1873년)를 거치는 동안 순교자들은 칼 아래 참혹하게 스러져갔다. 즉, 서소문 밖 네거리는 조선의 신분제 사회에 맞서 하느님 앞에 모든 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며, 서로 사랑할 존재임을 증거한 순교자의 터가 된 것이다. 특히 이곳에서는 신유박해 때 한국 천주교회 첫 세례자인 이승훈 베드로, 명례방 회장이었던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그리고 그의 장남 정철상 가롤로, 성호 이익의 제자로 녹암계를 형성한 권철신 암브로시오, 평신도 회장 최창현 요한과 여회장 강완숙 골룸바가 순교하였고, 기해박해 때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둘째 아들이자, 정약용의 조카인 정하상 바오로와 그의 누이 정정혜 엘리사벳, 북경을 오가며 성직자 영입 운동에 크게 공헌한 조신철 가롤로, 허계임 막달레나와 그녀의 큰 딸 이정희 바르바라, 둘째 딸 이영희 막달레나, 한국 최초의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 이광헌 아우구스티노와 그의 부인 권희 바르바라, 남명혁 다미아노 등이 순교하였다. 그리고 병인박해에 이르러서는 흥선대원군의 승정원 승지였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초 신학생 중 한 명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의 형 최형 베드로, 전장운 요한이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쳤다. 이중 이영희 막달레나, 이정희 바르바라, 허계임 막달레나, 남종삼 세례자 요한, 최형 베드로 다섯 분의 성인 유해는 이곳 서소문 밖 네거리 순교성지에 모셔져 있다. 종로성당-포도청 서울대교구는 2013년 2월 28일 서울 좌 · 우 포도청을 관할구역에 둔 종로 성당을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하고, 본당의 수호성인 또한 ‘포도청 순교 성인들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로 변경해달라는 청원을 승인하였다. 이로써 100년에 가까운 박해 기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하던 서울 좌 · 우 포도청 순교지가 새롭게 떠오르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설치한 좌포도청 표석은 현재 서울시 종로구 묘동 56번지(옛 단성사 자리) 종로 3가역 9번 출구 앞에, 우포도청 기념 표석은 종로구 종로 1가 89 일민미술관 앞 화단에 각각 자리하고 있다.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 마련 한편 포도청 순례지 성당으로 지정된 종로 성당은 구내에 ‘포도청(옥터) 순교자 현양관’을 마련하였고 당 외벽에 포도청 순교성인들을 기념하여 설치한 청동부조 ‘수난과 영광’(김일영 교수 작) 제막식도 가졌다. 아울러 종로 성당에서 시작하여 좌우 포도청 터 등을 거쳐 명동 성당과 중림동약현 성당에 이르는 2개의 도보순례길 코스를 제시하였다. 좌포도청– 남종삼 요한 신앙 증거 좌포도청은 한성부 정선방 파자교 동북쪽에 위치하여 조선 시대 서울 동,남,중부와 경기좌도를 관할하였으며 중종 무렵 설치되어 고종31년까지 존속하였다. 포도청에서 천주교 박해에 개입한 것은 1795년 북산 사건으로 발생한 을묘박해 때가 최초였다. 기록상 명확하게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성인으로는 최경환 프란치스코, 민극가 스테파노, 허임 바오로, 남경문 베드로, 임치백 요셉 성인이 있다. 복자 가운데에는 1795년 을묘박해 때 윤유일 바오로, 지황 사바, 최인길 마티아가 좌포도청으로 끌려가 혹독한 매를 맞고 순교하였다. 또한 기해박해 때 정하상 바오로, 엥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 모방 나베르로 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 신부가 형장으로 끌려가기 전 마지막까지 이곳에서 신앙을 증언하였다. 우포도청 – 유대철 베드로 순교, 김대건 신부님 옥중서한 작성 장소 우포도청은 조선 중종 무렵 설치되어 1894년까지 350여 년 동안 존속한 서울의 포도, 순라 기관으로 중부 서린방 혜정교 남쪽 인근에 위치하였으며, 서울 서부, 북부와 경기우도 등을 담당하였다. 103위 성인 중 22위, 124위 복자 중 5위가 포도청에서 순교하였는데, 기록상 분명한 순교성인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열세 살의 어린 나이로 순교의 영광을 얻은 유대철 베드로 성인 있으며, 병오박해 때 한이형 라우렌시오, 우술임 수산나, 김임이 데레사, 이간난 아가타, 정철염 가타리나가 우포도청에서 끝까지 신앙을 증거하다가 혹독한 매질 아래 순교하였다. 새남터 순교성지-김대건 신부님 순교 한양성 밖 남쪽 한강변에 있던 새남터는 본래 노들 혹은 한자로 음역(音譯)해서 사남기(沙南基)라고 불리던 곳으로, 조선 초기부터 군사들의 연무장으로 사용됐고 국사범을 비롯한 중죄인의 처형장으로 사용되어 왔다. 1801년부터 1866년까지 무려 10명의 프랑스인 사제와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11명의 목자가 이곳에서 거룩한 순교의 피를 흘렸다. 서소문 밖 네거리를 ‘평신도들의 순교지’라고 한다면 이곳은 ‘사제들의 순교지’라고 말할 수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치명한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시작으로, 1839년 기해박해 때는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새남터의 이슬로 사라졌다. 1846년 병오박해 때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와 그 동안의 순교를 “기해 일기”로 남긴 현석문이 이곳에서 참수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의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가운데 새남터에서는 베르뇌 주교, 브르트니에르, 볼리외, 도리, 푸르티에, 프티니콜라 신부 등 6명의 프랑스 사제들과 우세영, 정의배 두 평신도들이 순교의 피를 뿌렸다. 이렇듯 서소문 밖 네거리, 당고개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사상 가장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새남터는 1950년 순교 기념지로 지정됐고, 1956년에는 여기에 ‘가톨릭 순교 성지’라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1981년에는 한강 본당에서 새남터 본당이 분리 · 독립했고 1987년에는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한옥 양식으로 현재의 기념성당을 건립해 봉헌했다. 2006년 9월 3일에는 성당 지하 주차장을 개조해 ‘새남터 기념관’을 새로 만들어 축복식을 거행하고 전시실로 사용하고 있다. 남한산성 순교 성지 – 김성우 안토니오 아들 김성희 순교 이곳은 서기 1791년 신해(辛亥), 1801년 신유(辛酉), 1839년 기해(己亥), 1866년 병인(丙寅) 네 차례에 걸쳐 한덕운, 김덕심, 정은 등을 위시하여 70명 이상(실제 순교자 2-3백 명으로 추산) 순교한 곳임." 순교성지의 이정표를 본 순례객들은 바로 이곳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막 지나온 동문을 통해 신앙 선조들은 오랏줄에 묶여서 살아서 들어왔지만 혹독한 고문 끝에 결국은 시체가 되어 성 밖으로 던져졌다. 더욱이 살아서 동문을 들어온 이들은 죽어서는 물이 빠지는 구멍으로 성 밑에 파놓은 수구문을 통해 내팽개쳐졌다. 그래서 수구문(水口門)은 시구문(屍口門)이 되었고, 이곳으로 흘러내리던 물도 핏물이 되었으며 동문 밖 계곡에는 시신이 쌓였다. 남한산성에서 맨 먼저 호교의 노래를 부른 이는 광주 의일리(현 의왕시 학의동)에 살다가 1801년에 체포되어 동문 밖에서 참수된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다. 그 뒤를 이어 광주의 거북뫼 곧 구산(현 하남시 망월동) 출신인 김만집(金萬集, 아우구스티노)이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진실한 통회와 애덕의 정을 지닌 채" 순교하였다. 박해자의 손길은 얼마 되지 않아 이미 교우촌으로 알려져 있던 구산에 뻗혔다. 이내 김문집(베드로)을 비롯하여 집안의 어른 남자들이 모두 체포되었고, 남한산성으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되었다. 당시 김문집의 나이는 66세의 고령이었다. 그와 함께 체포된 김씨 집안의 신자들은 김성우 성인의 외아들인 성희(암브로시오), 순교자 김만집의 차남 차희, 김문집의 외아들 경희, 경희의 5남이자 성희의 양자인 교익(토마스), 경희의 6촌 윤희 등 모두 6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김교익만이 안면 있는 포교의 도움으로 생환하였을 뿐 모두 순교하였다. 결국 구산의 순교자는 김성우 성인을 비롯하여 모두 7명이 된 셈이다. 구산 성지 – 김성우 안토니오와 아들 김성희 고향 구산 성지는 김성우 안토니오 성인의 고향이자 박해시대에 많은 순교자를 배출한 유서 깊은 교우촌인 구산 마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구산에서 태어난 김성우 성인은 36세에 두 동생과 함께 세례를 받고 친척과 이웃들을 입교시켜 이 지역을 교우촌으로 만들었습니다. 한동안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을 수행하며 온 마을에 복음을 전한 성인은 1836년 모방 신부가 입국하자 자기 집에 모시기도 했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 때 체포됐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1840년 다시 가족들과 함께 붙잡혀 한양 포도청으로 압송되었습니다. 포도청에서 형조로 이송되어 갖은 고문을 당한 성인은 배교를 강요하는 재판관에게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을 것입니다."라며 결코 신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마재성지 – 정약종 아우구스티노, 정철상 가를로, 정하상 바오로 마재성지는 복자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형제들을 비롯해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한 그의 부인과 자녀 등을 현양하며 조성한 성지다. 특히 교구는 복자 정약종 일가가 이룬 성가정의 모범을 본받아, 보다 많은 가정들이 신앙과 사랑을 배우는 요람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이곳을 성가정 성지로 선포했다. 복자 정약종의 부인은 성녀 유조이(체칠리아)이며, 자녀들은 복자 정철상(가를로)·성 정하상(바오로)·성녀 정정혜(엘리사벳)이다. 또한 마재는 정약종의 형인 정약현·정약전과 동생인 정약용(요한 세례자) 4형제의 고향이자 한국교회 요람지의 하나로, ‘거룩한 부르심의 땅’으로 불리고 있다. 성 남종삼 순교자 남상교 유택지 순교자 남상교 부자가 살던 집인 성 남종삼·순교자 남상교 유택지는 현풍 현감, 영해 부사, 충주 목사를 지낸 순교자 남상교(아오스딩)가 관직을 스스로 내려놓고 신앙생활에 전념하기 위해 마련했던 집이다. 남종삼(요한) 성인은 당시 임금을 보좌하던 승정원의 일원으로 좌승지로 발탁돼 나랏일을 하던 분으로 아버지 남상교와 열심한 신앙생활을 이어왔었다. 성인은 1866년 3월 7일 서소문 밖 광장에서 참수 치명 순교하고 이날 체포된 남상교 순교자는 그해 4월 17일 공주 충청 감영에서 옥사 순교했습니다. 남종삼 성인은 순교자 남상교의 양자이다. 남종삼 성인의 친부는 남원교로, 종숙부인 남상교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로 가게 되었던 것이다 은이성지 – 김대건 안드레아, 김제준 이냐시오 은이 마을은 한국인 최초로 사제가 된 성 김대건 신부가 소년 시절을 보낸 골배마실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으로 1836년 15세의 소년 김대건이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를 받고 최양업, 최방제와 함께 신학생으로 선택되어 마카오로 파견된 곳입니다. 또 1845년 사제 서품을 받고 귀국한 김대건 신부의 첫 사목지가 바로 은이 공소였습니다. 성 김대건 신부가 성소의 씨앗을 뿌렸던 곳이자 그 열매가 가장 먼저 열렸던 곳이 바로 은이 마을, 은이 공소입니다. 그리고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한 모방 신부의 사목 활동의 중심지 또한 은이 공소였습니다. 골매마실 성지 – 김대건 안드레아, 김제준 이냐시오 성 김제준 이냐시오는 1814년에 순교한 김진후 비오(Pius)의 손자이며, 1846년에 순교한 김대건 신부의 부친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의 박해로 시련을 당한 서민의 집에서 태어나 충청도 면천 솔뫼라는 산골에서 살았다. 그 후 내포의 솔뫼로 거처를 옮겨 새살림을 시작하고, 아내 우르술라와의 사이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1846년에 참수를 당한 최초의 조선인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Andreas)이다. 성인은 신심이 두터운 신자였다. 박해가 심해지자 성인은 가족들과 함께 살던 곳을 버리고 용인 한덕골과 은이로 피신해 생활하면서 신앙을 지켜나갔다. 이후 성인은 모방 신부로부터 세례와 견진성사를 받고 회장직을 수행했다. 신심이 두터웠고 매사에 성실했던 그는 만사를 주님의 섭리에 맡긴다는 자세로 살았기 때문에 아들이 전교 신부들에게 선택되어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에도 온 가족이 당하게 될 무서운 형벌과 환난을 오로지 주님의 안배와 섭리에 맡기고 아들을 보냈다. 아들이 떠난 후 그는 관헌들의 추격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기해년 9월 중순 그의 사위의 인도를 받은 배교자 김여상이 포졸을 이끌고 그의 집으로 몰려왔다. 증인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기운이 장사여서 대여섯 사람쯤은 해 치울 수 있었으나 조금도 반항하지 않고 포승을 받았다고 한다. 포도청으로 붙잡혀간 이냐시오는 사학을 신봉한다는 죄와 자기 아들 안드레아를 국법을 거슬러 조선을 떠나 마카오에 가게 하였다는 죄, 즉 국사범이라는 중죄를 가해 혹독한 형벌을 당하였다. 지독한 혹형을 당하였지만 다시는 마음을 굽히지 아니하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들 김대건 신부의 장한 모습도 보지 못한 채 서소문 밖에서 참수를 당하니 때는 1839년 9월 26일이요, 나이는 44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치명자산 성지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중철 요한 이곳은 예부터 승암산(중바위산)이라 불렸는데 산정에 천주교 순교자들이 묻힌 이후로는 치명자산 혹은 루갈다산으로 더 많이 불리우고 있다. 이곳에는 호남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선교사 영입과 서양 선진 문화 수용을 하다가 국사범으로 처형된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부인 신희, 동정부부로 순교한 큰 아들 유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이(루갈다), 둘째 아들 유문석(요한), 제수 이육희, 조카 유중성(마태오) 7분이 하나의 유택에 모셔져 있다. 이분들 가운데 다섯 분이 2014년 8월 16일 복자의 품위에 오르셨다. 이분들은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9월부터 4개월여에 걸쳐 전주 남문 밖(현 전동선당), 전주옥, 숲정이에서 처형되어 멸족되었다.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시체를 거두었으나 고향인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땅에 묻히지 못하고 들 건너 재남리 바위백이에 가매장되었다. 그 후 1914년 4월 19일 전동 성당 보두네 신부와 신도들이(Francois Xavier Baudounet, 尹沙勿, 1859-1915) 이 산정에 모셨다. 선인들이 해발 300미터의 산정에 순교자들을 모신 뜻은 세계교회가 ‘진주 중의 진주’라고 찬탄하는 동정부부순교자의 순결한 신심과 고매한 덕행, 그리고 숭고한 순교정신을 높이 기리고 그 님들이 전주를 수호해 주기를 기원함이었다. 전라북도 지방 기념물 제68호로 지정된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복자들의 순교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4년 5월 9일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고, 그 아래 왼편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과 오른편에는 전주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순교신앙을 가슴에 품고 있는 이 산은 진리의 뜻을 세운 사람과 순교자들을 흠모하는 순례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며, 기도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뜨(순교자산)이다. 초남이 성지 -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유중철 요한 초남이 성지는 유항검과 그의 가족이 살았던 생가터이다. 유항검은 1784년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고 내려와 가족들과 가솔들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김제, 금구, 고창, 영광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했다. 가성직 제도 아래에서 신부로도 활동했지만, 가성직제의 부당함을 알고 난 후에는 그 일을 그만두고 다른 동료들에게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그 후 동료들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함께했다. 1795년에는 주문모신부가 이곳에 내려와 미사를 집전하고 유항검과 교회의 여러 현안들을 논의했다. 유항검은 신유박해(1801) 때 체포되었고 ‘대박청래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지목되어 대역무도죄를 선고받아 그해 9월 17일 풍남문 밖(전동성당)에서 능지처참형으로 순교했다. 또한 그의 가족들은순교하거나 유배되었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 되었다. 또 이곳은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부부의 삶을 4년동안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살던 유항검의 가족들 중 7명이 신유박해 때 순교했는데이들의 시신은 처음에 바우배기에 모셨다가 1914년에 치명자산으로 이장했다. 여행전체크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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